youme
너와 나, 합해서 우리.
필시 틀린 점괘일세
"점을 AS 받는다고요?" 저녁을 먹으러 가던 택시 안이었다. 잠깐 점집에 들리자는 선배에게 끌려 허름한 상가 한 켠에 우두커니 앉았다. 선배는 너도 온 김에 점을 보라고 부추겼다. 내 생시를 물은 점쟁이가 웨딩드레스 디자이너를 할 팔자란다. 생전 겪어 본 적 없는 삥을 여기서 뜯기는구…
있는 그대로
빨간 건 사과. 기차는 빨라를 이해하기 시작할 무렵. 아마 그때부터였을 거다. "엄마 닮았으면 예뻤겠네"라는 말을 오조 구억 삼천 번쯤 들으면 '가정법'에 회의적인 사람으로 성장하게 된다. 도레미부터 은파까지. 체르니 기초부터 50번을 완주하기까지 걸린 10년. 그동안 나는 건반보…
불안의 서
허울만 좋은 명함을 호기롭게 내팽개치고 백수가 된 스물여섯. 평일 낮 한적한 수영장에서 레인에 가느다랗게 매달려 둥둥 떠 있던 내가 종종 떠오른다. 익사로 오해받는 게 귀찮아 가끔 배를 뒤집어 수영장 천장을 관망했다. 빈 껍데기 육신과 텅 빈 동공으로 보내는 생체신호였다. 그때나 …
그러니 살아있으라
"울산대 병원입니다" 익숙한 간호사의 목소리가 전두엽을 울린다. 한여름의 캐럴 같은 알람 버튼. 벌써 일 년이 지났구나.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로 지정된 9년 전. 아산병원에서 차트를 작성하면서 알았다. 나는 '생존자' 그룹에 속해있었다. 대부분의 피해자가 사망한 사건. 이 공기살…
N과 S의 미용실
시간 거지에게 미용실과 치과는 동일 선상에 있다. 일년에 한 번이면 족한 연례행사. 우주선 모양의 기계가 머리칼을 아나콘다처럼 휘감는 동안 시선은 노트북에 고정. 자고로 미용실은 잡지 정독의 산실이건만 정작 잡지 발행인인 내겐 이번 달 별자리 운세를 볼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
순수의 공소시효
"엄마! 이슬이 꽃을 씻겨주나 봐." 말간 얼굴을 바짝 들이민 아이가 종알종알 얘기한다. 호기심은 오직 맑은 영에 깃든다. 우리에게 시간을 거스를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처럼 순수함에도 공소시효가 있을까. 나는 오직 아이만이 발견할 수 있는 세상의 아름다움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기억의 …
Dear. My Sunshine
"잠보 잠보 뿌아나 하바리 가니 은주리 사나 와게니 와카리 비슈아 케냐 예뚜 하쿠나마타타!" 관자놀이에 핏대를 세우며 열창하는 아이를 보며 안도감이 밀려왔다. 케냐 민요가 아니라 외계어면 어떠하리. 네가 신나게 부르면 그만이지. 시도 때도 없이 노래를 불러 젖히는 아이가 귀여워 합창 …
너를 통해 비로소 나를
3년을 못 버티고 이렇게 가는 건가. 한 몸이 되어 살아온 노트북이 자주 블랙아웃 된다. 딱 내 꼴 같다. 잠수교 아래 코만 겨우 내민 채로 간헐적 호흡 중인 꼬락서니.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해저에서 달음박질쳤건만 숨을 들이켜자마자 물귀신에게 발목을 잡히고 만다. 남은 에너지의 …
생각만 해도 슬픈 음식
"여기 들어오는 너희는 모든 희망을 버려라." 장엄한 저음의 목소리가 안개처럼 깔렸다. 오디오북 속의 단테도 파를 써는 나도 지옥의 문을 지나고 있었다. 눈물 콧물 샘을 활짝 개방한 채 파와 사투를 벌이는 배경 음악이 단테의 <신곡> 지옥 편이라니. 제법 잘 어울린다. …
가장 크게 웃은 날
"미술관 오픈런이라니." 자고로 미술관은 시간의 굴레에서 벗어나 유유자적 떠다녀야 제맛이거늘. 설렘의 핏기를 뺀 심드렁한 목소리가 삐져나왔다. 모처럼 볕이 좋은 토요일, 오전 10시의 청량함을 머금은 공기가 제법 차가웠다. 숙박비를 아끼려 전날 심야버스를 택한 리스크는 컸다. 옆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