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 살아있으라

2025. 07. 23byyoume

 

 


 

 

"울산대 병원입니다" 익숙한 간호사의 목소리가 전두엽을 울린다. 한여름의 캐럴 같은 알람 버튼. 벌써 일 년이 지났구나.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로 지정된 9년 전. 아산병원에서 차트를 작성하면서 알았다. 나는 '생존자' 그룹에 속해있었다. 대부분의 피해자가 사망한 사건. 이 공기살인의 추적검사는 사실 누구를 위한 것인지 모르겠다. 혹여나 상대적으로 건강한 내 폐활량 수치가 다른 피해자에게 해가 될까 노심초사. 엄마의 등짝 스매싱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매일 막차로 귀가하던 이팔청춘이었던 나는 가습기 노출 시간이 적었다. 그야말로 운이 좋았다.

 

"대표님 살아계셨네요" 입이 바싹 마르면서 기억회로가 타들어 간다. 내 안면인식 기능엔 최소한의 저장 공간만 존재한다. 명함 위의 '00기술지주연합'과 전혀 연결고리가 잡히지 않는다. 균일하지 않은 주파수로 감탄사만 내뱉는 사이 상대가 던지는 퍼즐 조각을 얼기설기 맞춰간다. 창업 초기, 힐튼 00, 1 2일 해커톤. '그런데 도대체 뭘 기억하는 거지?' 차마 발화되지 못한 질문들을 목구멍에서 누르는 동안 입만 뻐끔거렸다. "일년에 창업팀만 수백개를 심사하는데 저라고 어떻게 다 기억하겠어요. 아무튼 대표님 되게 기억에 남았어요." 상대의 저의를 파악하는 의심이 뭉게뭉게 피어난다. 분명 둘 중 하나다. 잘했거나 망했거나.

 

'정부 지원사업 제발 졸업하자!' 다짐의 만리장성을 쌓으면 뭐 하나. 마감 전날이면 밤새 계획서를 쓰는 게 루틴이 되었다. 지원금의 규모를 떠나 떠안아야 하는 일의 항목은 세포처럼 불어난다는 게 문제. 각종 서류 증빙부터 중간보고는 애교 수준. '무슨 행사에 발표하러 와라, 캠프 참여해라, 멘토링은 필수다.' 그 모든 게 살뜰한 간섭임을 알면서도 삼선 슬리퍼를 신고 한라산을 등반에 끌려가는 느낌이다. 누군가를 평가하고 점수를 매기는 게 심사위원의 일이라지만, 뭐든 적당히가 제일 어려운 법이다. 별별 사람을 대면하다 보니 인공지능 시대에도 왜 여전히 사람들이 노자를 필사하는지 공감하게 되었다.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떼면 안 되는구나. 살아보지 않은 남의 인생을 재단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게 없구나. 글자를 꾹꾹 눌러쓰던 열 살 꼬마처럼 내 입 밖으로 꺼내는 단어의 뜰채가 더욱 촘촘해졌다.

 

"저도 심사만 하다 지금 운영하는 투자회사는 창업한 거예요. 대표가 되어 보니 알겠더라고요. 정말 세상의 모든 대표님 존경합니다." 그 말이 묘하게 위로가 되었다. '너도 참 힘들었겠다' 그런 위로가 낯간지러운 미사여구 백 마디 보다 더 진한 울림으로 다가왔다. 반지하 장마철 곰팡이처럼 증식하는 일에 지배당한 지 오래. 허나 살아남은 자에게 선택할 수 있는 내일은 기적에 가깝다. 반복되는 일상에 무뎌지는 생존 감각이 출렁일 때면 생의 의지를 다잡는다. '살아있으라' 5음절에 내포된 끈질긴 경이로움에 감탄하면서.


 

youme

너와 나, 합해서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