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me
너와 나, 합해서 우리.
내가 차린 식탁에 초대하고 싶은 단 한 사람
부엌에 들어설 때면 앞치마 대신 오디오북을 장전한다. 극도로 싫어하지만 내가 당면한 의무감과 정면승부 시작. 그나마 만만해 보이던 레시피도 내 손을 거치면 쓰레기 통으로 직행하는 기적. 2900원. 장바구니 물가를 체감하는 동안 묵직한 알감자 뭉치가 레이더에 걸렸다. 설탕만 넣어 조려도…
빌런 플레이 리스트를 전투복 삼아
셀프 감금. 단출한 일상에 익숙해졌다. 제한된 시간을 인질 삼아 스스로 감금하고 통제하는 삶에 가깝다. 모니터에 얼굴을 박고 공기 중에 떠다니는 와이파이를 붙잡은 채 나를 코너로 밀어 넣는다. 시간은 만들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 할 일의 목록을 지워내는 것보다 깜빡이 없이 밀고 들어…
너를 미루지 않을게
누군가를 이렇게 사랑할 수 있을 거라고, 생의 의지가 이토록 투철해질 수 있을 거라 감히 상상도 못 했다. 아이의 지나간 어제를 붙잡으며 정작 펄펄 뛰는 오늘은 놓치는 일상을 살아간다. 떼쓰는 아이와 종일 실랑이를 벌이면서도 눈은 시계에 고정. 빨리 씻기고 줌에 접속한 다음 저녁을…
[핀란드에서 만든 조각들] 안녕, 여름!
한국의 초여름과 핀란드의 따뜻한(?) 더위를 보내고 8월부터는 긴팔을 주섬주섬 입기 시작한다. 이번 여름이 시작되면서부터 기록을 하다 보니 여름이라는 계절을 가장 좋아하는구나 알게 되었다. 그래서 2025년 여름에게 안녕을 고하며…여름이어서 좋은 것들을 공유해보려고 한다.## 여름비, …
필시 틀린 점괘일세
"점을 AS 받는다고요?" 저녁을 먹으러 가던 택시 안이었다. 잠깐 점집에 들리자는 선배에게 끌려 허름한 상가 한 켠에 우두커니 앉았다. 선배는 너도 온 김에 점을 보라고 부추겼다. 내 생시를 물은 점쟁이가 웨딩드레스 디자이너를 할 팔자란다. 생전 겪어 본 적 없는 삥을 여기서 뜯기는구…
있는 그대로
빨간 건 사과. 기차는 빨라를 이해하기 시작할 무렵. 아마 그때부터였을 거다. "엄마 닮았으면 예뻤겠네"라는 말을 오조 구억 삼천 번쯤 들으면 '가정법'에 회의적인 사람으로 성장하게 된다. 도레미부터 은파까지. 체르니 기초부터 50번을 완주하기까지 걸린 10년. 그동안 나는 건반보…
불안의 서
허울만 좋은 명함을 호기롭게 내팽개치고 백수가 된 스물여섯. 평일 낮 한적한 수영장에서 레인에 가느다랗게 매달려 둥둥 떠 있던 내가 종종 떠오른다. 익사로 오해받는 게 귀찮아 가끔 배를 뒤집어 수영장 천장을 관망했다. 빈 껍데기 육신과 텅 빈 동공으로 보내는 생체신호였다. 그때나 …
그러니 살아있으라
"울산대 병원입니다" 익숙한 간호사의 목소리가 전두엽을 울린다. 한여름의 캐럴 같은 알람 버튼. 벌써 일 년이 지났구나.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로 지정된 9년 전. 아산병원에서 차트를 작성하면서 알았다. 나는 '생존자' 그룹에 속해있었다. 대부분의 피해자가 사망한 사건. 이 공기살…
N과 S의 미용실
시간 거지에게 미용실과 치과는 동일 선상에 있다. 일년에 한 번이면 족한 연례행사. 우주선 모양의 기계가 머리칼을 아나콘다처럼 휘감는 동안 시선은 노트북에 고정. 자고로 미용실은 잡지 정독의 산실이건만 정작 잡지 발행인인 내겐 이번 달 별자리 운세를 볼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
순수의 공소시효
"엄마! 이슬이 꽃을 씻겨주나 봐." 말간 얼굴을 바짝 들이민 아이가 종알종알 얘기한다. 호기심은 오직 맑은 영에 깃든다. 우리에게 시간을 거스를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처럼 순수함에도 공소시효가 있을까. 나는 오직 아이만이 발견할 수 있는 세상의 아름다움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기억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