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보 잠보 뿌아나 하바리 가니 은주리 사나 와게니 와카리
비슈아 케냐 예뚜 하쿠나마타타!" 관자놀이에 핏대를 세우며 열창하는 아이를 보며 안도감이 밀려왔다. 케냐 민요가 아니라 외계어면 어떠하리. 네가 신나게 부르면 그만이지. 시도 때도 없이 노래를 불러 젖히는 아이가 귀여워 합창 수업을 보냈다. 부끄럽다고
쭈뼛거리던 녀석이 수업 첫날 친구들 앞에서 그날 배운 '연어야 연어야'를
독창했다고 한다. "이렇게 귀여운 친구가 왜 이제 왔나 싶었다니까요!" 전화 너머 합창 선생님의 상냥한 목소리에 어떤 기억이 소환되었다.
열 살 무렵 나는 친구를 따라 성악 레슨을 받았다. 몇 달 후 친구는
합창단에 들어갔고 나는 그 이후로 목소리를 봉인했다. 라디오에서 좋아하는 노래가 흘러나와도 입만 뻥긋거렸다. 혼자 있을 때조차. 이따금 악몽에 등장하는 성악 선생님은 몽달귀신처럼
얼굴의 형체가 없다. 검은 피아노 건반 위의 손과 고압적인 목소리만 선명할 뿐. 나는 지금껏 음치라는 콤플렉스로 짓눌려 살았다. 자의로 노래를 부르게
된 건 온전히 아이 때문이었다.
자정이 넘어도 눈을 말똥말똥 뜨고 보채는 아이를 보며 미칠 지경이었다. 이
녀석만 재울 수 있다면 인어공주 대신 우르술라에게 내 목소리 따위 당장이라도 바칠 수 있을 것 같았다. 엄마가
섬 그늘에 굴따러 가면. 이건 너무 슬퍼서 안 자나? 자장자장
우리 아가는 다른 가사가 있었던가? 선곡이 맘에 안 들었는지 아이가 금박이 번쩍이는 보드북을 꺼내 툭
던진다. 읽으라는 신호. 상감마마인지 폭군인지 모를 성질머리마저
왜 귀여운 거지? 웃음을 끅끅 목구멍 뒤로 삼키고 해저 터널 같은 목소리에 시동을 건다. ‘You're my sunshine’ 노래로 만든 그림책을 불러주다 입에 착 붙어버렸다.
"엄마 ‘You're my
sunshine’ 잘 부르잖아. 내가 얼마나 좋아하는데!"
지하 감옥에 햇살이 한 줌 들어오면 이런 기분일까? 알고 난 다음엔 돌이킬 수 없는 세계가
있다. 한때는 과거를 여행하는 초능력을 갈망했다. 지금과
완벽하게 다른 삶은 행복 언저리에 있을 것만 같았다. 엄마가 되어 마주한 삶의 궤적은 종잡을 수 없었다. 어쩌면 (나만 모르게) 평행
우주 어딘가에 살고 있는 또 다른 자아로 바꿔치기 당한 것일지도 모를 일. 분명한 건 이제 녀석이 없는
과거는 무의미한 시간의 굴레라는 사실이었다.
잠든 아이를 토닥이며 생각한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얽혀 있던 우리가
다른 행성으로 분리되어 서로의 궤도를 벗어나는 순간. 나는 육체를 이탈해 내 빈소에서 조문객을 맞는
너를 바라보고 있지 않을까? 생의 마지막 순간에 자리를 빛낸 귀빈들이 장례식장에 웬 BGM이냐고 물으면, 넌 이 노래를 어떻게 설명할까? 나는 내 인생의 선샤인이 되어 준 너에게 받은 사랑을 돌려줘야지. 이
노래를 빌어.
youme
너와 나, 합해서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