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을 AS 받는다고요?" 저녁을 먹으러 가던 택시 안이었다. 잠깐 점집에 들리자는 선배에게 끌려 허름한 상가 한 켠에 우두커니 앉았다. 선배는 너도 온 김에 점을 보라고 부추겼다. 내 생시를 물은 점쟁이가 웨딩드레스 디자이너를 할 팔자란다. 생전 겪어 본 적 없는 삥을 여기서 뜯기는구나. 허탈함의 쓰나미가 떼로 몰려왔다. 드로잉은커녕 내가 쓴 글씨도 못 알아보는 천하제일 악필이 디자이너라니요. 그것도 웨딩?
창업한 이래 이런 선무당을 집중적으로 만났다. 시니어 인턴으로 모신 경력직 인턴은 네비도 오락가락 길을 잃는 논두렁 밭두렁 사이로 전원주택으로 나를 불렀다. 여기서 집을 짓고 산 지 십 년도 넘었는데 텃세 심하기로 유명한 경주 사람들은 여전히 이방인 취급한다는 고난의 정착기가 1절. 갑자기 2절의 불똥이 나에게 튀었다. 앞으로 농업이 유망하니 여기 들어와 농사를 지으라니. 정부지원금을 받아 "날 고용해 쓰세요!" 서릿발 굵은 목소리에 들고 간 샤인 머스켓 보따리를 풀던 손이 머쓱해졌다.
멘토링 지원 프로그램에서 만난 어떤 이는 두 시간 동안 딸 자랑만 늘어놓았다. "정대표 보니 딸 같아서.."라는 마지막 멘트에 콧털까지 쭈뼛 소름이 돋아 연신 재채기를 쏟으며 서둘러 배웅했다. 난생 처음 정부 지원사업을 받아 나에게 배정된 멘토는 초면에 "이거 진짜 할 거예요?"라며 짧은 다리를 애써 삐딱하게 꼬았다. 내가 누군가의 걸림돌이 되지 않으려면 반드시 살아남아야겠다는 오기가 생겼다.
죽을힘을 다해 몇 달 만에 시제품으로 들고 간 창간준비호를 까딱거리던 심사위원은 "애 엄마가 운동화 질끈 묶고 달릴 생각을 해야지 말이야. 또각거리면서 하이힐 신고 다니는 꼴이네?"라며 코웃음 쳤다. “누구보다 잘 만들 수 있는 역량을 보여드리려 몇 달을 밤새워 만들었다.”고 응수하며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심사를 마치고 나오는 길. 전봇대 아래서 담배를 빡빡 피우며 흘겨보던 멸시의 눈빛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원통하고 비통해 그날 밤새 이불킥을 날렸다. 오기는 애송이의 것. 독기가 자라다 못해 골수 사이로 알알이 맺혔다.
연일 악천후 속에 가랑비처럼 좋은 멘토도 만났다. 초기 창업 심사에서 만났던 나를 당신 분과에서 만날 줄 몰랐다며 반가워하는 담당 교수님 덕에 얼떨결에 분과장이 되었다. 정작 나는 여전히 우리가 어디서 만났는지 기억의 웜홀에 갇혀 있었으나. 00사관학교라는 타이틀만큼 요건도 필수교육도 평가도 숨 가쁘게 몰아쳤지만 그만큼 혜택과 지원금도 많았다. 동병상련의 대표들과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아 해결하는 설움을 나누며 가쁜 숨을 골랐다.
그 많은 멘토를 거치면서 한 번도 여성 멘토를 만나지 못한 게 애석했다. 지역의 현실일 수도 평등과 자유의 상징일 것만 같은 스타트업 신의 견고한 장벽을 드러내는 단면일 수도 있다. 적어도 나에게 존재한 단 2퍼센트의 응원군처럼 나도 누군가의 멘토가 되어줘야지. 내가 차곡차곡 적립한 독기를 봉침 삼아 혈을 뚫어줘야지. 내 비록 아직 성공은 못했으나 살아남은 것 자체가 기적이라 할 수 있으니. 이 정도면 쓸만한 멘토가 될 거란 패기 정도는 가질 자격 있다고 믿으면서.
youme
너와 나, 합해서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