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저씨

2026. 04. 21byyoume

 


 

 

분홍 넥타이를 곱게 매고 슬레이트 문을 밀고 나오는 그와 마주쳤다. 동틀 무렵까지 놀다 새벽 첫차를 타고 귀가하던 나는 반사적으로 인사를 건넸다. ", 안녕하세요!" 유니폼이 아닌 사복을 입은 그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이제 들어오는 거야?"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우리는 구면이었다. 어떤 음식을 좋아하고 취미는 무엇인지 사적인 정보는 몰라도 매일 얼굴을 마주하며 친밀함을 적립한 사이. 정장을 곱게 차려입고 퇴근하는 아저씨의 둥글게 휜 눈꼬리가 넥타이핀에 닿아 반사되는 햇살만큼 눈부셨다

 

"저는 동네 경비 아저씨의 원더걸스입니다" 지금 보면 손가락이 오그라드는 문장을 자기소개서에 쓸 정도로 나는 인사성 밝은 아이였다. 돌이켜 보면 좋은 어른들을 만난 덕분이었다. <월리를 찾아라>처럼 아파트 코너를 돌면 복사해서 붙여넣기 한 듯 곳곳에서 경비 아저씨들을 마주쳤다. 어느 비 오는 날엔 엄마에게 등짝 스매싱을 맞고 울며불며 버린 Club H.O.T. 팬클럽 우비를 입고 분리수거 구역을 정리하던 아저씨와 마주친 적도 있었다

 

똑같은 모자와 유니폼을 입고 동네 곳곳을 돌보던 경비 아저씨들의 얼굴이 또렷이 기억나지는 않는다. 한 평짜리 좁은 경비실에서 쪽잠을 자다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동틀 무렵. 예관을 단정히 갖추고 퇴근하던 아저씨가 인상에 남은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아무도 보는 이가 없을 새벽 퇴근길을 출근길처럼 대하는 마음에 탄복했다. 어느 날 집이 빨간 차압 딱지로 도배되었을 때도 아저씨는 든든한 수문장을 자처했다. 놀란 마음을 진정시킬 틈 없이 야금야금 짐을 옮기러 드나들 때도 우리는 평소와 같은 인사를 나누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별다른 질문의 군더더기나 호기심 어린 눈빛도 없이 담백하게

 

앞자리가 2로 바뀐다 해서, 당당하게 민증을 들이밀며 맥주 피처를 주문할 수 있다 해서 어른이 되는 건 아니었다. 한때 아무 경계 없이 열던 도어락을 도둑고양이처럼 슬금슬금 열고 들어가 소리를 죽이며 짐을 챙겼다. 밖에서 쿵쿵 문을 두드리는 낯선 기척이 들리면 사그라들기를 기다렸다 부러 위층으로 올라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왔다. 취조하듯 경비아저씨를 다그치는 사채업자에게 "그 집 사람들 코빼기도 못 봤으니 찾아오지 말라"며 으름장을 놓는 아저씨 등에 기대어 무사히 빠져나갔다. 좋은 어른이 있어 그 시간의 고비를 넘을 수 있었다. 살면서 그 시절을 떠올린 것도 실로 오랜만이다. 봄이면 유난스레 목련 꽃망울이 흐드러지던 경비실 입구가 떠오른다. 다시 만나면 그때 정말 고마웠다고 목구멍에서 틔우지 못한 진심을 전해야지 다짐하면서


 

youme

너와 나, 합해서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