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엌에 들어설 때면 앞치마 대신 오디오북을 장전한다. 극도로 싫어하지만 내가 당면한 의무감과 정면승부 시작. 그나마 만만해 보이던 레시피도 내 손을 거치면 쓰레기 통으로 직행하는 기적. 2900원. 장바구니 물가를 체감하는 동안 묵직한 알감자 뭉치가 레이더에 걸렸다. 설탕만 넣어 조려도 맛있지. 미각의 추억을 더듬어 알감자 껍질을 칫솔로 샅샅이 씻어 냄비로 입수시켰다. 보글보글에서 부글부글. 발화점이 더뎌 화장실 청소로 넘어간 사이 온 집안이 시커면 안개로 뒤덮였다. 철 냄새로 코팅한 알감자들이 분노의 용광로에서 눈에 불을 켜고 타들어 가고 있었다. 화재 경보가 울리는 순간 끝이다. 가전제품이 침수되기 전에 황황스레 냄비를 들고 뛰쳐나왔다.
집 안 모든 창을 열어 종일 환기를 시켜도 냄새가 가시질 않다니. 똥 손 엄마를 향한 타박도 쉽게 빠지지 않는 탄 냄새만큼 긴 꼬리로 따라붙는다. 한바탕 소동 사이 한소끔 식혀 버리려던 냄비를 홀랑 까먹었다. 다음 날 아침 남편의 문자. '출근하면서 냄비도 버렸다. 복도에 잔뜩 밴 냄새 우리가 배상해야 할 수도 있다.' 밖을 나설 때마다 스멀스멀 죄책감의 스멜이 몰려들었다. '비상문을 무단으로 열면 처벌의 대상이 됩니다'라는 사인을 보며 환기를 포기했다. 애써 용기를 쥐어짠 마음이 매서운 옆집 할아버지의 주름처럼 구겨졌다.
프랑스 인형 같은 엄마의 우월한 유전자는 어디로 증발하고 나는 똥손만 물려 받았나. 고향의 맛도 엄마의 손맛도 나는 모르겠다. 엄마의 음식 중에 제일 맛있는 건 팬케이크. 틈만 나면 요리 프로그램을 시청하던 엄마를 보며 생각했다. 의지와 재능이 반드시 비례하는 건 아니다. 좋다는 건 이것저것 넣어 끓였는데 뭐가 부족한 걸까. 엄마표 도시락을 펼칠 때면 안쓰러웠다. 시판 양념으로 잰 고기나 소세지가 아니면 안 팔려 끝까지 남는 반찬은 내 몫이었다. 엄마는 모른다. "넌 날 안 닮아 다행이야"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내 속에선 천 불, 아니 만 불이 끓어오른다는 걸. 속만 끓이고 말도 못한 채 억울함만 삭히거나, 혹여 딴사람한테 피해가 될까 깡그리 안고 혼자 괴로워하는 당신 천성을 빼다 박은 게 나란 걸.
일찌감치 내 길이 아니라는 걸 간파한 나는 부엌을 벗어나기로 결심했다. ‘네가 화내면서 만드는 (맛없는) 요리를 먹고 싶지 않다’는 남편의 피드백도 한몫했다. 모두의 행복을 위한 식량 조달의 외주화. 나는 외식 비용을 기꺼이 지불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 세월 부엌에서 동일한 좌절과 한계로 버무려진 고통과 싸웠을 엄마를 위해 어떤 메뉴가 좋을까. 식재료를 수급하고 플레이팅까지 평균치의 두세 배는 더딜 내 실력을 자각할 때. 무엇보다 극강의 솔직함을 자랑하는 엄마의 캐릭터를 떠올릴 때. 하지 말라며 난리 쳐도 결국 행복해하던 엄마의 드레스 프로필 촬영과 홋카이도식 양고기 화로 코스를 돌이켜 볼 때. 지나가며 흘리던 오마카세 레스토랑이 엄마 마음속의 정답일 것이다. 똥손 DNA에 대한 원망은 꾹꾹 밥알에 눌러 두고 초밥 위의 호화스러운 산해진미 같은 말만 전해야지. 너무 솔직한 것보단 마음에 담아두는 편이 훨씬 현명하다. 그간의 경험치에 입각해 나는 그저 바빠서 요리를 못한 걸로. 엄마는 모를, 그녀를 향한 나의 의리라 명명하면서.

youme
너와 나, 합해서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