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축축한 공기에 젖은 담배 냄새가 나는 인천공항. 한국에 왔다. 2년 만이다.
한국의 공기는 맑은 날에도 곧 비가 올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기뻤다가 슬퍼져버린 젊었던 날의 기억 같다고 할까.. 감성적인 것이 꼭 나이 탓인 것만 같다.
도착하고 며칠 후 우리는 제주에 머물렀다.
첫째 아이가 4살 때쯤 가족들과 함께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때 파트너는 제주 매력에 빠졌는지 자주 이곳으로 이민을 오고 싶다는 말을 했었다. 제주 여행의 기억은 우리가 어둡고 추운 핀란드 날씨를 통과하는 데 자주 쓰였다.
그렇게 파트너의 애착이 가득한 제주 여행을 계획하게 된 것이다. 파트너가 사고 싶어 하는 커다란 트럭과 외국인을 위한 야간 한국어 수업 현수막들을 가리키며 나는 연신 제주 이민을 어필했다.
제주도가 좋았다기 보다는 나는 집에 오고 싶었다.
핀란드에 살면서 '이곳에'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 적응하기 바빴을 뿐이다.
이러다 '사는 것' 같아지겠지 하며 12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사실 5년만 버텨보자 하다 아이가 생겨 눌러 앉아버린 케이스다.
서울토박이로 살다 결혼을 하여 다른 도시로 이주한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같은 나라인데도 내가 느끼는 감정들과 비슷한 고립감을 느낀다는 것이 '핀란드'의 문제는 아닌 듯했다. 아이를 낳고 친구들과 멀어져 육아로 고립을 느낀 사람들의 이야기도 들어보니 이것이 '장소'의 문제도 아닌 듯하다.
이것은 '사람'과 '관계' 그리고 그것이 주는 어떤 바이브와 느낌에서(같을 듯하지만 살짝 다른) 비롯된 것이라 어림 짐작해본다.
제주를 모든 것이 착착 풀릴 것 같은 환상의 섬으로는 보지 않는다. 우리는 언제나 속았다. 대학만 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하지만 다른 산을 올라야 하는 것이 대학에 간 후 밝혀졌기에 나는 더 이상 파랑새와 환상의 나라는 믿지 않는다.
체념한 어른의 모습일지도 모르겠지만 좋아함과 싫어함을 접시에 올려놓고 결국 상관없는 거 아닌가? 하는 일이 많아진 어른이 된 것 같다. 이런 나의 모습이 좋을 때도 싫을 때도 있다.
하지만 이것마저도 결국 상관없는 거 아닌가? 어찌됐건 일어날 일은 일어나니까.
제주에 다녀오고 며칠 후 파트너는 다시 헬싱키로 돌아갔다. 나는 아이들과 3주 더 한국에 머무를 예정이다.
엄마 찬스를 써 친구들을 만나고 그래도 자꾸 눈치가 보여 첫째 아이를 데리고 친구들 만나는 자리에 자주 나갔다.
내가 핀란드에서 느끼는 힘든 점들을 털어놓을 때 친구들에게 받은 위로, 별것 아닌 이야기에 소리 내어 웃을 수 있는 공감대들. 큰 것은 아니어도 일상적인 것에서 사람과의 연결이 느껴질 때 나는 '삶'을 느꼈다.
오랜만이었다.
한국에 올 때마다 나에게 늘 책을 선물하는 언니가 있다. 언니와 최근 읽은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장기하의 수필집을 추천받았다.
언니는 자기가 쓴 줄 알았다며 깔깔거렸는데 나도 깔깔이 고팠던 지라 다음날 바로 구입해서 읽었다.
제목부터 보이지 않는 동질감이 느껴졌다. '상관없는 거 아닌가
2주 후면 핀란드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남은 여름을 보내고 8월 아이의 첫 등교길에 눈물을 흘릴 것이다. 그렇게 가을이 되고 어두운 겨울이 올 것이다.
아무도 없는 고래 뱃속 같은 시간에서 나는 이번 한국 방문과 제주 이민을 어떻게 생각할지…핀란드에 남을지 제주로 이민을 할지… 이민이 결국 상관이 있을지 없을지…
솟구치는 대로 살고 싶다가도 아이와 가정을 돌보는 데 얼마나 그 솟구침을 누르는 것이 건강한 것일까?
나는 변화를 즐기며 발전을 도모하는 타입이다. 하지만 심심하고 느린 나라에 살며 내 안의 솟구침은 무시당해왔다. 사회의 속도와 나의 속도 사이의 차이, 엄마가 된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내가 하고 싶은 것의 온도 차이. 그 간극에 균형이 필요하다.
쿠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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