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할 일이 없겠네."
티베트의 격언이자 어느 일본인 심리상담가의 책 제목이고, 사직동에서 오랜 시간 짜이를 팔고 있는 그 가게 앞 입간판에 적힌 글귀이기도 하다. 어느 영화의 "루이즈가 그러는데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선 그저 마음 편히 먹고 흘러가게 두래."라는 대사를 읽고 이 문장이 떠올랐다. 어디선가 처음 이 글귀를 읽고는 속으로 '그야말로 지혜로운 말이로다. 내가 왜 이리 걱정을 한 아름 안고 사는가' 하였으나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할 일이 없겠"다는 격언으로 걱정하지 않을 수만 있다면 애초에 그게 무슨 걱정이었겠는가.
최근에는 비교적 걱정이 줄었다. 아기가 신생아였던 당시만 해도 내 엄마의 별명인 '걱정여사'를 그대로 물려받는 건 아닐까 하였다. 아기가 잠을 자고 있을 때면 종종 숨은 잘 쉬고 있는가 들여다보는 한편, 모든 일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주위 사람들을 격렬하게 미워하곤 했다. 아기가 성장하며 걱정이 덜하다. 아기가 스스로를 돌보리라는 신뢰가 커져가는 만큼, 걱정의 크기는 줄어드는 것이다. 게다가 이 녀석이 하필 구석이나 매트 아래와 같이 청소를 덜한 곳을 굳이 찾아 먼지를 주워 먹는 걸 보면, 위생에 예민했던 몇 달 전의 나는 온 데 간데없다.
육아를 하고 있는 덕분에 그야말로 "오늘만 산다"는 하루하루를 보내니, 미래에 대한 두려움도 예전보다 덜하다. 도무지 걱정을 할 여유도 없다. 다만 문득 내년 이맘때, 10년 뒤, 30년 뒤의 내 모습을 생각하면 몹시 두렵다. 걱정의 빈도는 줄었지만 강도는 높아졌다. 과연 나는 언제까지 무슨 일을 하며 살 수 있을까? 지금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걱정을 한다고 해서 내게 주어진 시간이 늘어나는 것도 아니니, 오늘도 걱정을 이만 접어두고 내일의 육아를 위해 잠을 청해야겠다. 누구의 노랫말처럼 잠은 오지 않아도 기상 시간은 정해져 있으니까.
한도리
생각만 해도 슬픈 음식
"여기 들어오는 너희는 모든 희망을 버려라." 장엄한 저음의 목소리가 안개처럼 깔렸다. 오디오북 속의 단테도 파를 써는 나도 지옥의 문을 지나고 있었다. 눈물 콧물 샘을 활짝 개방한 채 파와 사투를 벌이는 배경 음악이 단테의 <신곡&g…
가장 크게 웃은 날
"미술관 오픈런이라니." 자고로 미술관은 시간의 굴레에서 벗어나 유유자적 떠다녀야 제맛이거늘. 설렘의 핏기를 뺀 심드렁한 목소리가 삐져나왔다. 모처럼 볕이 좋은 토요일, 오전 10시의 청량함을 머금은 공기가 제법 차가웠다. 숙박비를 아끼려 전날 심야버스를 택한 리스크는 컸다. 옆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