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기 들어오는 너희는 모든 희망을 버려라." 장엄한 저음의 목소리가 안개처럼 깔렸다. 오디오북 속의 단테도 파를 써는 나도 지옥의 문을 지나고 있었다. 눈물 콧물 샘을 활짝 개방한 채 파와 사투를 벌이는 배경 음악이 단테의 <신곡> 지옥 편이라니. 제법 잘 어울린다.
관심이 없는 분야가 생존을 위한 필수 요소일 때 혼자만의 지옥도가 펼쳐진다. 파
한 단에 1,700원. 동네 마트의 떨이 공격은 파리 지옥에
가깝다. 냉동해둔 파가 제법 남았고 요리를 자주 하는 것도 아닌데. 무시무시한
황화 가스 공격에 눈물 쏙 빠지는 화생방 지옥으로 나를 몰아넣었다. 그사이 단테는 아케론강을 건너1, 2, 3 지옥의 층층 계단을 지나고 있었다.
잠깐 빨래를 널고 오는 사이에 인덕션을 흥해로 만들어 버린 미역국이나 사카린 조절에 실패해 쓴맛만 남은 옥수수는 죄가 없다. 떨이 지옥에 빠져 데려온 알감자는 새까맣게 타버린 냄비와 쓰레기통으로 입수. 노력에 비해 성과가 현저하게 떨어지는, 비효율의 끝판왕이지만 6시가 되면 나는 부엌으로 향한다. 배철수의 음악캠프를 노동요 삼아 억지로 흥을 끌어 올린다. 냉동식품을 에어 프라이어에, 완조리 국을 냄비에, 햇반을 전자레인지에 넣고 데우는 것에도 정성스런 수고가 필요하다.
제철 나물을 데치고 압력솥에서 고슬고슬 윤기 나는 쌀밥을 차려주는 엄마의 밥상을 받을 때면 생각한다. 엄마가 되지 않았다면 그 한 끼에 담긴 시간을 몰랐겠지. 애정으로
응축된 그 모든 것을 익숙하게 받기만 했겠지. 당연함의 지옥에 빠져 무지를 앞세워 외면한 채 유한한
시간의 끝에서 지난날의 나를 저주하겠지. 어쩌다 자신의 품으로 기어들어 오는 자식을 위한 엄마의 밥상에는
계절이 농축되어 있다. 조금 더 싱싱한 제철 재료를 찾아 부러 먼 재래시장에 가고, 무심한 딸년의 "맛있다"
한 마디가 기꺼워 연근조림은 상비 식품으로 구비한다. 나를 위한 한 끼는 허기를 때우는
것에 가깝다는 걸 엄마가 되고서야 알았다.
차린 건 없다고 말하는 엄마의 시간을 생후 사십 년이 지나고서야, 초라하고
볼품없는 저녁상을 아이에게 내밀며 사과부터 하는 엄마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알알이 깨닫는다. "밖에서 뭐 하러 돈 써!" 핀잔에 담긴 엄마의
마음이 보여서, 머나먼 집으로 딸을 배웅하는 엄마의 속이 헛헛하지 않도록 헤어지기 전엔 맛집을 찾는다. 혼자서라면 먹기 힘든 세트 구성이나 엄마가 좋아하는 이국적인 요리를 찾아 남의 손을 빌려 근사한 한 끼를 내놓는다. 유한한 시간의 굴레에 후회하지 않도록 남이 차린 상을 마주하고서야 비로서 별스럽지 않은 일상을 털어놓는다. 서울역 파이브가이즈에서 땅콩을 까먹으며, 고속버스터미널 후라토식당에서
규카츠를 뒤집으며, 그렇게 우리의 시간을 적립한다. 나의
태초인 그녀를 공기처럼 마주할 수 있도록 아주 먼 훗날을 차곡차곡 대비한다. 미래의 나를 위해.

youme
너와 나, 합해서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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