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어떠한 무리의 관객은 엔딩 크레디트가 모두 올라갈 때까지 상영관 내 조명을 꺼두느냐, 본편 영상이 끝나자마자 환하게 불을 켜 관객이 퇴장하도록 하느냐를 기준으로 그 극장의 '격'을 따졌다. 소위 예술영화를 상영하는 곳이라면 관객이 영화의 여운을 즐기고, 영화를 만든 모든 사람의 정보와 수고를 알 수 있도록 엔딩 크레디트가 끝날 때까지 암전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동숭시네마텍, 씨네큐브 등 예술영화관뿐만 아니라 CGV무비꼴라쥬와 같은 멀티플렉스 극장의 일부 다양성영화전용관에서도 이 규칙을 지켰는데, 이러한 문화를 처음 겪었던 관객들은 상영관의 조명이 고장 난 것은 아닌가 하며 나갈 길을 찾지 못하고 어리둥절해하던 기억이 난다.
한편 2010년 대를 풍미한 마블 스튜디오의 영화에는 엔딩 크레디트가 모두 올라간 뒤에 '쿠키 영상'이 등장하여 상영관을 나가려는 관객의 발목을 붙잡았다. 이전에도 엔딩 크레디트에 NG 장면을 넣거나 특별한 애니메이션을 처리하는 등 관객에게 마지막까지 볼거리를 제공하려는 노력이 있었지만 마블의 쿠키 영상은 극장이 엔딩 크레디트를 대하는 방식을 크게 변화시켰다. 출산 후 답답한 마음을 극장에서 풀어내곤 했는데 집 근처에 마침 메가박스가 있어 드문드문 갈 수 있었다. 많아야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관객이 극장에 앉아 영화를 보기 시작하는데 엔딩 크레디트가 모두 올라가고 나면 남는 건 대체로 나 하나다. 하지만 마블 영화만은 달랐다. 다른 영화에 비해 관객 수도 많을뿐더러 영화의 러닝타임만큼 시간이 흐르고 상영관 안에 불이 켜지면 그제야 자리를 일어서는 관객이 대부분이다.
영화는 다른 유형의 예술과는 달리 관객이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다고 했다. 물론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도 큰돈이 들지만, 관객이 더 이상 영화관을 찾지 않는다면 극장에서 상영할 수 없고, 극장에서 상영되지 못하는 영화는 누구에게도 보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마트폰 하나로도 영상을 쉽게 만들고, 유튜브와 같이 개인이 전 세계 수많은 사람에게 창작물을 공유하는 플랫폼이 있는 요즘에는 엔딩 크레디트이니 뭐니 하는 것도 다 낭만적인 얘기다. 잠시 옆길로 새자면 한참 영화를 극장에서 보던 당시의 나는 멀티플렉스에 좀처럼 가지 않았는데, 섬에 갇혀 살다 보니 그조차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특히 코로나19 등 어려운 상황을 지나며 사라져 간 인천공항 CGV와 롯데시네마 대신 자리를 지켜준 메가박스에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어째서 여기에? ㅋㅋ)
하지만 엔딩 크레디트가 없는 영화도 있다.
흑백 화면 중앙에 고풍스러운 서체로 'The End'라는 글자가 등장하며 과감하게 끝을 맺는 영화. 엔딩 크레디트는 영화가 산업으로 자리매김하고, 거대 자본의 든든한 반석 위에서 스펙터클의 성을 올렸던 1960년 대에 들어서야 본격적으로 사용되었다. 영화가 소리도, 색깔도 없는 화면만으로 존재하던 때에는 영화 제작에 관여하는 사람의 수가 적어 오프닝 크레디트에 제작, 배우, 감독과 몇몇 주요 스태프의 이름만 올리곤 했다. 점차 오프닝 크레디트에 넣어야 할 이름이 많아지자 영화 초반 몰입이 어려워지니 점차 엔딩 크레디트로 이행을 하게 된 거다. 고전 영화에는 엔딩 크레디트가 없으니 영화 본편이 끝나면 정말 끝이다. 마치 앙코르곡이 없는 공연처럼 어색하지만 꽤 개운한 맛도 있다.
문득 내 삶의 끝에 흐를 엔딩 크레디트엔 과연 누구의 이름이 몇이나 오르게 될까 궁금하다. 인생의 오프닝 크레디트엔 고작해야 엄마, 아빠, 조금 더 쓰자면 조부모님까지 종교를 가졌다면 감히 신의 이름을 넣을 수도 있겠다만, 엔딩 크레디트이라면 어떨까. 어느 날 차분히 자리에 앉아 엔딩 크레디트를 적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친구에게 이 얘기를 했더니 "내 이름도 넣어 줘"란다. "당연하지. 게다가 너는 상단에 오를 거야. 등장 순서로 하든, 역할을 비중으로 하든 말이야"하고 대답했다. 아기가 생기며 내 인생의 엔딩 크레디트가 분명 재조정 중이다. 종종 나만의 엔딩 크레디트를 상상하며 내 인생을 점검해 보는 것도 괜찮지 않겠나.
한도리
나쁜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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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기분: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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