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개월쯤부터였다.
책을 읽어주면 잠자코 듣고만 있던 아기가 그 작은 손가락으로 책장을 휙휙 넘기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오른쪽 검지를 들어 그림을 하나 둘 가리키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채지 못했는데 그 그림이 나타내는 물체에 사람이 붙인 이름을 말해주었더니 다른 그림을 가리켰다.
맨 처음으로 가리킨 그림이 무엇이었던가. 감자 또는 오이 중 하나였던 것 같다. 엄마 친구의 아들로 2살 정도 더 먹은 형아에게 물려받은 마트 놀이 책을 보다가 야채 그림에 관심을 가졌다. 이후 온갖 물건과 사진, 그림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는데 마치 사운드북의 버튼을 누르면 노래가 나오듯 내 입에서는 단어가 흘러나왔다. 같은 그림을 집게손가락으로 여러 번 찍을 때는 정말 기계가 된 듯, 그러나 친절한 목소리로 같은 단어를 반복하여 말했다.
한동안 아기는 아빠가 주문한 축구공, 농구공, 럭비공, 야구공 세트 중 각각의 공 이름 익히기를 즐겨했다. 동물 사진을 보면서는 특히 소, 아니 '음메'에 관심을 많이 두었다. 어쩌면 ''엄마'와 발음이 비슷해서는 아닐까?' 나 혼자서 고의적 오해도 해보았다.
최근에는 이전과 차원이 다르게 강한 애착을 가지는 대상이 생겼는데 바로 '빠빠'다. 19개월 아기에게는 아직 이응 발음이 어려운지 자동차가 오가는 모습, 각종 탈 것을 그린 그림을 보면 '빵빵' 대신 자신 있게 '빠빠!'를 외친다. '자도차'도 몇 번쯤 따라 하여 세 글자 단어를 말하기에 신통하다 생각했으나, 영 귀찮은 모양인지 며칠 가지 않아 모든 탈 것은 '빠빠'로 통일이다.
11개월로부터 어느덧 8개월이 흘렀는데 여전히 아기가 검지 손가락을 들어 물체 또는 그림을 가리키면 나는 각각의 이름을 반복하여 말해준다. 그러면 아기는 배시시 웃는다. 모든 존재에 각기 다른 이름이 붙어있다는 게 신기하고 신이 나는 모양인지 수줍고도 환한 미소를 띤다. 좋아하는 '빠빠'를 말할 때면 포동포동한 볼살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구친다. 나는 그 얼굴이 참 좋다. 아기의 반짝이는 눈이 너무나 사랑스럽다.
유명한 시를 인용하자면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데, 아기가 내게 세상의 온갖 이름을 물었을 때 나는 큰 기쁨을 누렸다. 아기와 함께하는 덕분에 비로소 일상 속 작은 변화에서 행복을 발견하는 법을 배웠다. 19개월째 나 역시 성장하는 중이다.
한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