괘씸한 철학 번역

2025. 11. 23by에그

2025년 11월 23일 일요일

코디정 작가의 [괘씸한 철학 번역]을 읽다가 <언어 유린의 무한 순환 사건의 전모>라는 글에서 잠시 생각을 더해본다. 이 글에는 외국어로 쓰여진 철학책이 국내로 번역되면서 새로이 만들어진 철학 단어들이 학계에 자리 잡는 과정이 실려 있다. 이 글에 생각이 머무는 이유는, 나는 글을 읽거나 쓸 때 사전을 많이 신용하기 때문이다. 먼저 작가의 주장을 간단히 정리해본다.

어느 저명한 대학 교수가 책을 번역하면서 한자어를 조합한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낸다. 그 후 교수나 제자들이 그 '새로운 단어'로 논문을 쓴다. 때로는 학술상을 받기도 한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새로운 단어'는 권위를 얻어가고 사전 편찬자는 그 '새로운 단어'를 사전에 등록한다. 시간이 흘러 '새로운 단어'에 의문을 갖는 사람이 생긴다. 그는 '새로운 단어'를 사전에 검색한다. 사전은 이미 '새로운 단어'를 설명하는 좋은 증거가 되어 있고, 의문을 가졌던 사람은 본인의 어휘력에 한탄하며 의문을 접는다. 이로써 언어 유린의 무한 순환이 반복된다.

작가는 너무 어려운 철학서에 의문을 가지고 이 책을 썼다. 작가는 철학을 언어 활동이라고 말하며 "언어 활동은 소통을 위해, 지식을 전하기 위해,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벌이는 활동이다." 따라서 한국인이 읽을 철학책은 한국인이 사용하는 한국어로 번역되어야 하며 일본식 한자어의 단순한 음역이나 한국인이 사용하지 않은 한자어는 원활한 소통을 위해 사용을 자제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전을 찾아보며 한탄했던 기억, 아주 많다. 그 경험의 상당수는 정말로 나의 어휘력이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을 수 있다고 의심해 본 적은 없다. 많은 책을 만나면서 다른 방식으로 보는 연습과 노력을 하면서도 사전을 의심하거나 다른 방식으로 볼 생각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언어는 시대나 문화에 따라 변한다는 걸 알면서도 어째서 사전은 어떤 진리로 생각했던 걸까. 어쩌면 고민의 수고로움을 덜기 위해 무작정 받아들인걸지도 모른다. 다시 과거의 나에게 한탄한다.

어떤 권위있는 책도, 사전도 다른 방식으로 볼 수 있다는 걸 기억하자.

에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