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올 것처럼 먹색 구름이 언덕 너머에서 성큼성큼 걸어오던 아침이었다. 바람 끝이 서늘해지자, 아이들은 “비 오겠다” 하고 창문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그 먹구름이 마을 지붕들을 덮기 전에 갑자기 뒤쪽에서 햇빛이 쏟아졌다. 마치 누군가 스위치를 잘못 눌러 구름과 햇살을 동시에 틀어놓은 듯했지. 그러다 잠깐 뒤, 양동이째 뒤집은 듯한 비가 울퉁불퉁한 지붕 위에서 요란하게 쏟아졌고, 아이들은 환호성을 질렀다가 곧바로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와 젖은 발자국을 찍었다. 한순간의 흥분이 지나고 나니 또다시 햇살이 들이쳤다. 우간다의 날씨는 이제 계절과 약속을 주고받지 않는 것 같다. 건기와 우기가 흐릿해진 지 오래라, 하늘은 늘 즉흥적으로 기분을 바꾸고, 나는 그 변덕스러움을 마주하고 산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하늘을 보며 중얼거리게 됐다. ‘날씨만 그런 게 아니지.’ 방금까지 따뜻하게 아이들 머리를 쓰다듬다, 금세 짜증이 목 끝까지 치밀어 올라 가라앉히지 못한 채 날카로운 말이 튀어나오는 날들이 있다. 남편이 욕실 전기 콘센트를 만지작한 걸 보고 “왜 이렇게 허둥대?” 하고 언성을 높였다가도 곧 후회하며 조용히 입을 닫는 내 모습이 겹친다. 아침만 해도 다정이란 말을 몸에 두르고 있던 사람이, 해가 중천에 오르기도 전에 그걸 벗어던진다. 점심쯤이면 다시 애써 줍는다. 반나절도 못 가는 다정이라니, 나도 참 우습다. 그런데 그런 날이 잦아졌다.
하늘이 매일 다른 기분을 보여주면 그저 ‘변덕스러워라’ 하고 넘기면서, 정작 내 마음이 요동치는 건 쉽게 용서하지 못하는 나. 아침에는 아이들 간식을 싸며 콧노래를 흥얼거렸지만, 오후에는 바닥에 흘린 우유 한 방울에 마음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주안이가 놀란 눈으로 “엄마, 미안해” 할 때마다 뒤늦게 밀려오는 죄책감이 폐 속 깊은 데까지 내려가더라.
한 번은 한창 비가 억수처럼 쏟아지던 날이었다. 예주가 문 앞에 놓아둔 젖은 신발을 제때 치우지 못한 탓에 신발 바닥에 붙어 있던 빗물이 또르르 떨어지면서 거실 쪽으로 살금살금 번져 갔고, 그 물이 모여 동전만 한 웅덩이가 된 거다. 그 작은 물웅덩이를 본 순간, 마치 내 안의 어느 뚜껑이 툭 하고 열려버린 것처럼 목소리가 커졌다. 예주는 놀라 어깨를 움찔했고, 그 얼굴을 본 순간 내가 더 놀랐다. ‘이게 뭐라고. 왜 이렇게까지.’ 비는 여전히 떨어지고 있었고, 아이는 자리에서 꼼짝도 못 한 채 젖은 신발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 나는 우산 하나 없는 아이처럼 혼자 비 맞으며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다. 누가 악의도 없고 실수도 큰 게 아닌데, 왜 나는 이렇게 쉽게 무너지는 걸까. 거실 바닥의 물 자국이 마치 내 마음에 생긴 얼룩 같아 오래 보게 됐다. 흙탕물이 들면 금방 알아채듯, 마음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으면 좋으련만.
사람들은 다들 이렇게 살까. 다정함이 오래가지 않는 날, 배려가 문턱에서 힘없이 미끄러지는 날, 누군가의 엄마이자 아내라는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 것 같은 날. 이런 날이 겹치면 나는 괜히 혼자 큰 실패를 한 것만 같아 숨이 얕아진다. 저녁 무렵, 집 앞 길가에 빗물이 반짝거리는 걸 보며 멍하니 서 있었던 날도 있다. 비는 그치고 해는 기울어 갔지만, 내 마음은 계속 젖어 있었다. 그날 저녁, 빗줄기가 잦아들 무렵 집 앞 정원에 핀 꽃을 바라보다가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하루 종일 비에 젖어 축 늘어져 있던 꽃잎 한 장이, 생각보다 단단하게 제 모양을 다시 세우고 있었다. 물방울이 끝에서 또르르 떨어지자, 꽃잎은 아주 조심스럽게 몸을 펴듯 흔들렸다. 그 작은 흔들림이 이상하게 마음에 오래 머물렀다. 흔들린다고 다 부러지지 않고, 젖었다고 다 시들지 않는다는 걸 눈앞에서 보여주는 것 같았다. 마음도 그럴 수 있지 않겠느냐고, 흔들리는 날이 이상한 게 아니라 자연스러운 거라고, 그 작은 떨림이 사람을 더 부드럽게 만든다고. 그렇게 꽃이 말을 건네는 것만 같았다.
하늘을 다시 바라보니 먹구름이 옅은 분홍빛으로 변해 있었다. 참 이상한 색이었다. 짙은 먹색에서 금빛을 거쳐 분홍빛이라니, 하늘도 하루를 견디느라 참 바쁘겠다 싶었다. 그러다 문득, 나도 하늘만큼이나 다양한 얼굴을 가진 존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떤 날은 환하고 어떤 날은 흐리고, 때로는 비가 내리고, 그 사이사이에 무지개 같은 순간도 있다. 변덕스러운 게 아니라 살아 있는 것이다. 부끄러운 게 아니라 사람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풀렸다.
아이들이 저녁밥 냄새를 맡고 뛰어오며 “오늘은 뭐 먹어?” 하고 묻던 순간, 그 눈동자에서 작은 햇빛들이 반짝였다. 그 반짝임 하나면 오늘의 비도, 오늘의 짜증도, 오늘의 후회도 조금은 덜 무겁게 느껴졌다. 아마 내일도 하늘은 자기 마음대로일 것이다. 나도 그럴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변하는 것들이 모두 불안한 건 아니라는 걸, 변화 속에서 조금씩 단단해지는 부분도 있다는 걸. 불쑥 몰아치는 비를 피하다 보면 어느 순간 햇빛이 다시 나를 비춘다는 걸 이곳에서 배워가고 있다. 하늘이 내게 보여준 것은, 변덕이 아니라 살아 있음이었고, 부족함이 아니라 계속 움직이는 마음의 모양이었다. 그래서 이번 뉴스레터에는 조용히 이런 말을 건네고 싶다. 변덕스러워도 괜찮다고. 햇빛처럼 환한 날보다, 비구름 아래 서 있는 날이 더 많은 사람도 있다고. 그럼에도 묵묵히 하루를 버티는 자신을, 실패라 부르지 말아 달라고.

기록하는비꽃
작가
우간다에서의 일상을 글로 씁니다. 『일상의 평범함을 깨우다』를 펴냈고, <포포포매거진 뉴스레터>에 삶을 기록 중입니다. 좋아하는 것을 덕질하며, 해낙낙하게 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