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연휴가 지났다.
몇 년 전부터 수많은 직장인이 손꼽아 기다렸다는 2025년 추석 연휴였다. 개천절인 10월 3일 금요일을 시작으로 10월 10일 하루만 휴가를 내면 열흘 가까이 내리 쉬는 꿈의 연휴에, 나 역시 유급 휴일을 조금은 즐기는 반쪽짜리 직장인일 줄은 미처 몰랐다. 모처럼 꿀맛 같은 휴일에 그간 밀린 일, 집 정리, 남은 한 해를 잘 보내고 미래를 준비할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그러나 연휴는 생각과 달랐다. 다른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정반대였다.
"연휴가 너무 길어요.", "연휴가 빨리 지나가면 좋겠어요.", "드디어 연휴가 끝났어요."
이제야 또 이해합니다, 선배님들의 마음을요. 아기를 어린이집에 들여보내고 일을 다시 시작한 게 불과 반년쯤인데, 어느새 엄마로 보내는 시간보다 그렇지 않은 시간이 더 긴 생활에 익숙해져 버렸다. 통근 거리가 꽤 먼 탓에 평일에는 아침에 최대 30분 정도 아기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퇴근길에는 그를 영상통화로 만나는 게 고작이다. 주말에서야 엄마 노릇을 하는데, 이 어린이 요즘 하는 말과 행동이 꽤 귀여워서 같이 신나게 놀다 보면 반찬은 시판으로 때우기 일쑤다.
그러니 오랜만에 맛보는 '찐' 육아가 어땠겠는가. 그야말로 매운맛, 죽을 맛이다. 밤이 되면 출근하는 날보다 더 녹초가 되어 다른 무엇도 할 수가 없고, 막 말을 배우기 시작하여 한창 신이 난 아기에게 장단을 맞춰주자니 목이 아파 자꾸만 기침이 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힘든 건, 돈 버는 일을 나가지 않는 동안 해둬야지 했던 다른 일을 대부분 포기해야만 했다는 사실. 현재를 위한 정리, 미래를 위한 준비를 하려 했지만 시간은 야속하게도 길이를 늘여주지 않았다.
/
답답한 마음으로 연휴를 보내다 맞이한 주말, 고등학교 때 친하게 지내던 친구 여럿을 만났다. 사춘기를 함께 부대끼며 견딘 뒤로는 한동안 서로 연락을 주고받지 않았는데, 어느새 엄마가 되어 다시 만나게 되었다. 물론 이는 우리를 보이지 않게 계속해서 연결하고 있었던 한 친구의 덕분이다. 그의 새 집 마련을 축하하느라 모이는 자리였는데, 우리 집 어린이는 낯선 곳에 적응하기까지 투정을 부리며 웬일로 엄마의 목을 끌어안았다.
처음이었다. 아기가 태어난 후 2년이 다 되어가는 동안, 이 녀석이 무언가를 무서워하거나 낯설어하여 내게 이 정도로 적극적으로 안겨온 적이 있었나? 쭈뼛대거나 울기는 했어도, 엄마를 찾으며 다가오기는 했어도 두 팔로 목을 감싸 안고 떨어지지 않겠다고 말한 건 적어도 내 기억에는 처음이다.
어린이 넷과 어른 일곱이 모여 한바탕 시간을 보내고, 집에 돌아와 잠든 아기는 자극이 많았던 탓인지 자꾸만 깨어나 울었다. "아빠 아니야, 엄마야"라며 아기는 또 나를 찾았다. 꼭 안고 괜찮다고 속삭이자 이내 안정을 되찾고 "침대에 누워요"라고 속삭이는 어린이. 눕힌 뒤 자장가를 불러주고 잘 자라고 말하니 "잘 자"라고 다시 대답을 해온다. 문을 닫고 나오며 하얗고 동그란 빛이 내 마음에 가득하다는 걸 깨달았다.
/
이유를 정확히 알지는 못하겠다. 평소 엄마를 보지 못했기에 더 귀하게 느껴졌는지, 주양육자인 아빠보다 (부채감이든 신선함에서든) 더 신나게 놀아주려는 엄마가 마음에 들었는지, 그도 아니면 엄마를 찾고 싶어도 내가 늘 그 자리에 없었던 탓인지. 이유야 무엇이든 내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며 자책하던 시간에 아기는 엄마와 눈을 마주치고, 함께 놀고, 크게 웃었다. 연휴 동안 곧 2살이 되는 이 어린이가 가장 많이 쓴 단어 중 하나가 "같이", "다 같이"다. (물론 교통수단과 색깔을 의미하는 말은 제외하고 말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더 안정적이고 그럴듯한 자리를 찾기 위해 하려던 일들을 해야 하는 중요한 시기였다. 어렴풋이 준비하던 일들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아마도 그걸 다시 하려면 1년은 더 기다려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1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도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을 가졌다. 이걸 또 이제야 깨닫는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엄마가 되고는 매 순간 선택의 갈림길에 서있다. 양쪽 모두 안개가 자욱하여 그 끝이 보이지는 않지만, 당장 눈앞의 장애물을 피하고 가장 가까운 이정표를 향해서 조금씩 나아간다. 그래, 잘했다, 나 자신. 오로지 지금만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더 깊이 사랑을 했다. 그걸로 되었다. 무엇이 되었든 최선을 다해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고, 그저 행복해지자. 가족과 친구들과 더 많은 사람들과 밝은 빛을 나눌 수 있기를 바라.

한도리
N잡러
세 명이 한 가족, 섬에 살아요. "좋은 일 하시네요!"라는 말을 자주 듣는 업종에 종사하고 있어요. 주위를 둘러보며 걷기를 가장 좋아해요. 때로는 영화를, 소설을, 친구의 이야기를 걸어요.
사랑이 전부다
10개월 만에 한국이다. 모국이 여행지가 되니 기분이 색다르다. 그리스와 한국은 직항이 없고 아이와 단둘이 14시간 장거리 비행이지만 마음이 설렜다. 가족에게 줄 선물을 한가득 캐리어에 싣고서. 10월의 어느 가을날, 남동생 결혼식에는 마법처럼 비가 그쳤다. 자연 속 맑은 공기와 바람은…
춤이 나를 구원하지 못했을 때
20대 때 나는 친구, 음악, 춤이 좋아서 클럽을 드나들던 죽순이었다. 음악과 춤을 그렇게 좋아했으면서도 TV에 나오는 댄서들을 침 흘리며 바라보다 엄마가 되었다. 욕망이 있는 줄도 몰랐다가 그것이 환상이 되어 가는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깊숙이 자리한 욕망을 알아차렸다. 엄마가 되는…
상관 없는 거 아닌가?
한국의 축축한 공기에 젖은 담배 냄새가 나는 인천공항. 한국에 왔다. 2년 만이다.한국의 공기는 맑은 날에도 곧 비가 올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기뻤다가 슬퍼져버린 젊었던 날의 기억 같다고 할까.. 감성적인 것이 꼭 나이 탓인 것만 같다. 도착하고 며칠 후 우리는 제주에 머물렀다.첫째 …
걱정여사의 딸로 태어났지만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할 일이 없겠네." 티베트의 격언이자 어느 일본인 심리상담가의 책 제목이고, 사직동에서 오랜 시간 짜이를 팔고 있는 그 가게 앞 입간판에 적힌 글귀이기도 하다. 어느 영화의 "루이즈가 그러는데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선 그저 마음 편히 먹고 흘러가게 두…
생각만 해도 슬픈 음식
"여기 들어오는 너희는 모든 희망을 버려라." 장엄한 저음의 목소리가 안개처럼 깔렸다. 오디오북 속의 단테도 파를 써는 나도 지옥의 문을 지나고 있었다. 눈물 콧물 샘을 활짝 개방한 채 파와 사투를 벌이는 배경 음악이 단테의 <신곡> 지옥 편이라니. 제법 잘 어울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