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중과 상연, 그리고 안효섭까지

2025. 09. 24by기록하는비꽃

책상 조명에 의지한 방 안에서 드라마 <은중과 상연>을 보는 동안 감정은 점점 더 무겁게 가라앉았다. 은중의 고통은 단순한 서사의 장치가 아니라 가슴을 압박하는 현실처럼 다가왔고, 상연의 흔들림은 머릿속 깊은 곳까지 파고드는 떨림으로 남았다. 장면마다 숨을 고르지 않으면 따라갈 수 없을 만큼 감정이 스며들었고, 급기야 배우들의 연기에 압도되면서도 동시에 그들을 걱정하게 되었다. 카메라가 꺼진 뒤에도 이 감정을 견딜 수 있었을까, 촬영이 끝나고 난 후 그들의 마음은 무사했을까. 작품 속 인물이 아니라 배우를 걱정하게 된 건 낯설고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 드라마는 단순히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를 돌아보게 했다. 은중의 마지막 대사는 오래도록 귓가에 남았다. “오래 걸렸다.” 짧은 문장이었지만, 그 안에는 헤아릴 수 없는 시간과 감정이 응축되어 있었다. 상연의 사진을 책상 위에 올려두기까지 걸린 그 긴 시간은 어쩌면 나의 시간이기도 했다. 누구나 마음속에 오래 붙잡아 두고 있는 이름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 언젠가 다시 꺼내어 놓고, 비로소 풀어내야 하는 이름 말이다. 그 장면을 보며 오래 걸려도 풀리고 싶다고 바라는 관계가 떠올랐다. 언젠가는 다시 웃으며 마주 앉기를 바라는 얼굴도 있었고, 반대로 여기까지가 맞다고 생각하는 관계도 있었다. 더 이어간다면 상처가 될 뿐이니, 지금 이 지점에서 멈추는 게 서로를 위한 최선이라 믿고 싶은 순간 말이다. 은중과 상연의 과정을 지켜보며 각자의 관계들을 하나씩 불러내어 가늠하게 되었다. 드라마는 두 사람의 이야기였으나 동시에 인간이 서로에게 건네는 말과 침묵, 그 사이에 존재하는 시간의 무게를 다시 생각하게 했다.

 

그리고 무겁게 내려앉은 마음과 축축해진 감정을 가볍게 털어내게 한 배우가 있었다. 안효섭. 그의 얼굴을 또렷하게 각인한 건 로맨틱 코미디 <사내맞선>이었다. 능청스럽게 대사를 주고받으며 환하게 웃는 모습은 화면을 환히 밝혔고, 서툴지만 신선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때만 해도 ‘새로운 배우가 등장했구나’ 하는 가벼운 인상이 전부였다. 하지만 사실 그보다 앞서 <어비스>와 <낭만닥터 김사부 2>에서 이미 진지하고 묵직한 연기를 보여주고 있었으며,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서는 진우 역으로 목소리 연기까지 맡았다. 작품을 거듭할수록 그의 이름은 점점 더 무게를 얻어갔다. 그래서 다시 본 <사내맞선>은 같은 장면인데도 눈빛이 더 깊게 읽혔고, 대사 한 줄이 묘하게 달리 다가왔다. 예전엔 스쳐 지나갔던 작은 제스처와 표정의 리듬까지도 새로운 의미를 띠며 다가왔다. 한 사람이 성장하면 그가 남긴 작품도 함께 자란다는 것을, 그를 통해 처음 배웠다.

 

그렇게 달라진 시선으로 그의 연기를 보던 차에 최근 한 인터뷰는 그 인상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큰 인기를 예상했느냐는 질문에 잠시 웃더니 흥미로운 작품일 것 같아 도전했을 뿐이라고 담담히 말했다. 그리고 이어서, 지금의 인기가 다음 작품에 선한 힘을 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아주 감사하다고 덧붙였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속에서도 인기조차 ‘다음 작품을 위한 힘’이라 부르는 태도는 단순한 겸손을 넘어선 울림이었다. 그 말은 관계에도 닮아 있었다. 누군가에게서 받은 따뜻함은 또 다른 사람에게 따뜻하게 건넬 수 있고, 서운했던 마음도 다시는 같은 실수를 하지 않게 하는 힘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인연이든 결국은 고마운 일이다.

 

끌리는 이야기와 오래 마음을 붙잡는 장면들은 결국 내 안을 비추는 거울 같다. 그래서 <은중과 상연> 같은 드라마에 사로잡히고, 안효섭이라는 배우의 궤적을 따라가게 되는 것도 결국 내가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가와 닿아 있다. 은중의 “오래 걸렸다”라는 말이 마음 깊은 곳에서 계속 울리는 건 그 때문이다. 오래 걸려도 결국은 닿을 수 있기를, 혹은 오래 걸려도 놓아야 할 것을 놓을 수 있기를. 그 문장은 드라마 속 대사이면서도, 동시에 오래 묵혀둔 내 마음을 건드리는 말이었다.

 

안효섭의 연기는 그런 문장을 더 오래 머물게 만든다. 그의 눈빛과 표정은 장면을 넘어, 스스로의 관계와 감정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요즘은 그의 과거와 현재의 작품을 차례로 보고 있다. 단순히 한 배우를 좋아하는 마음을 넘어, 그를 통해 내 안의 어떤 시간을 들여다보게 되기 때문이다. 작품 속 은중과 상연이 오래 걸려 닿은 순간을 보여주듯, 그의 궤적을 따라가는 일은 나 또한 오래 붙들고 있던 마음과 마주 앉는 시간이 되지 않을까 하며.

기록하는비꽃

작가

우간다에서의 일상을 글로 씁니다. 『일상의 평범함을 깨우다』를 펴냈고, <포포포매거진 뉴스레터>에 삶을 기록 중입니다. 좋아하는 것을 덕질하며, 해낙낙하게 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