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천천히 음미하기

2025. 09. 23by오자히르

한국에 ‘빨리빨리’ 문화가 있다면 그리스에는 ‘천천히 천천히(Siga Siga) 문화가 있다. 삶의 속도를 늦추고 지금 이 순간을 즐기는 느긋하고 여유로운 삶의 방식이다. 처음엔 불편하기도 했지만 점차 다름을 존중하며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뭐든지 빠르고 효율적인 한국에서 완전히 다른 세계로 툭 떨어진 것만 같다. 

 

그리스인의 여유와 느긋함은 따뜻한 지중해성 기후 덕분이 아닐까. 우울할 틈 없는 연중 온화한 날씨, 눈 부신 태양, 아름다운 바다와 섬. 맑은 하늘만 봐도 금세 기분이 좋아진다. 햇볕이 따스하게 안아주고 쾌적한 바람이 시원하게 감싸준다. 조급해질 이유가 없다. 지구에 잠시 여행하러 왔다는 듯, 그리스인은 너그럽고 친절하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의 영향도 아직 일상에 남아있는 듯하다. 마음에 불안이 없는 평온한 상태, 즉 아타락시아를 추구하던 철학자의 후손답게 불필요한 욕망을 절제하고 소박하고 단순한 삶을 지향한다. 부와 명예, 권력보다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 개인의 자유, 휴식, 대화, 사색을 중요하게 여긴다. 어쩌면 그리스인은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아는 게 아닐까. 화려하지는 않지만 세상 그 누구보다 행복해 보인다. 

 

시간에 대한 개념도 특별하다. 그리스어로 시간을 뜻하는 단어 중에는 물리적 시간인 '크로노스(Chronos)'와 특별한 의미가 부여된 시간인 '카이로스(Kairos)'가 있다. 누구에게나 하루에 24시간이 주어지지만 과연 의미 있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카이로스는 더 능동적이고 자의적인 시간 개념이다. 삶을 소중히 여기고 주체적으로 행동하며 삶의 속도를 늦춰야만 알 수 있는 감각 아닐까. 시간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천천히 사유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처럼 자유롭고 가벼운 그리스인의 삶의 태도는 나를 자주 되돌아보게 한다. 주어진 역할과 의무에 따라 정해진 기준에 맞춰 살던 나를 새롭게 한다. 서로 다름을 존중하는 문화는 나를 더 나답게 만들어준다. 세상이 만든 상자에 들어가려고 부단히 애쓰던 나였는데, 그러지 않아도 괜찮다고 조용히 위로한다. 

 

'천천히'가 미덕인 그리스에 살며 달라진 점은 내 몸과 마음을 더 자주 살피고, 가진 것에 소중함을 더 느끼며, 무엇이든 깊이 바라보게 된 것이다. 눈앞의 풍경은 같은데 시선이 달라졌다. 삶의 속도를 늦추니 보인다. 매일 베푸는 친절. 일상의 작은 기쁨. 무용한 것의 아름다움. 외적인 성취 없이도 마음이 풍요롭고 충만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쉬어도 죄책감이 들지 않았다.

 

완전히 다른 세계에 오니 보인다. 우리는 그저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는 인간일 뿐 애초에 이래야 한다는 건 없다는 것. 우리는 계속 변하는 존재이므로 하나의 틀에 나를 가둘 필요도 없다는 사실. 옳고 그른 건 없다. 각자 고유하게 아름답다. 프레임을 벗어나니 자유롭다. 천천히 과정을 즐기는 삶.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문화. 건강하고 여유로운 그리스의 삶의 방식이다.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다그치는 사람은 더 이상 없다. 

 

그리스의 ‘Siga Siga’ 문화는 단순히 속도를 늦추는 게 아니라 삶을 천천히 음미하는 철학이었다. 결과가 아닌 과정, 미래가 아닌 현재에 집중하는 성숙한 삶의 태도다. 모두 아름답다는 것, 모두 지나간다는 것. 삶의 단순한 진리를 이해하고 실천하는 지혜 아닐까. 한국에서 야근에 주말도 없이 일하던 나를 그리스인이 봤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만 같다. "우리는 무언가 이루려고 지구에 온 게 아니야. 살아있다는 축복을 누리러 왔지." 단 한 번의 삶을 천천히 음미하는 그리스인의 여유를 배우고 싶다. 

 


 

오 자히르

sarahbaek5@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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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히르

번역가

단순한 삶 속에서 지혜와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