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때 나는 친구, 음악, 춤이 좋아서 클럽을 드나들던 죽순이었다. 음악과 춤을 그렇게 좋아했으면서도 TV에 나오는 댄서들을 침 흘리며 바라보다 엄마가 되었다. 욕망이 있는 줄도 몰랐다가 그것이 환상이 되어 가는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깊숙이 자리한 욕망을 알아차렸다.
엄마가 되는 것이 단절, 멈춤, 지연이라는 대명사처럼 쓰일 때가 있다. 나도 그렇게 믿어왔지만 스스로를 괴롭히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 엄마가 된 지 7년이 지나니 그것은 그저 다른 우주에서 점을 찍는 일일 뿐, 내 삶은 유유히 확장되고 있다. 큰 벽 뒤로 숨겨놓은 '춤'에 용기를 심어준 것은 '엄마'라는 이름 때문일지도 모른다. 꿈을 입으로만 말하고 실천하지 않는 엄마의 모습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엄마'라는 이름은 절대 가벼울 수 없지만 우리를 나아가게 하는 명사임이 틀림없다.
8월 초 댄스학원 가을 학기가 시작된다는 공고를 보고 바로 10번 패스를 결제했다. 처음 들어간 곳은 힙합 초보자 클래스였다. 선생님은 스페인 사람이었고 올드 스쿨 힙합을 주로 가르친다고 소개했다. 내 차례가 되자 부끄러움이 눈동자에까지 퍼지는 듯했다. '내가 이렇게 부끄러움이 많은 사람이었나? 집에서 아기만 보다 보니 내향적으로 변했나?' 어쨌든 부끄러움의 눈동자를 비벼대며 신체활동을 좋아하고 여러 춤을 섭렵하고 싶다는 포부로 자기소개를 끝냈다. 선생님은 90년대 힙합 노래를 크게 틀며 동작을 천천히 선보였다. '찰리스 스텝'이라는 동작과 함께 안무를 따라하기 시작하는데 거울은 왜 이렇게 많이 붙어있는지, 조명은 왜 이렇게 밝은지… 괜히 눈을 비비고 머리를 만지고 쭈뼛거리며 따라했다.
두세 번 따라하니 동작이 몸에 붙고 어색함은 사라졌다. 다만 하얀 크루넥 나시와 스트레이트 진이 힙합스럽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그 후 내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티셔츠와 바지를 골라 입고 매주 같은 시간에 힙합을 배우러 갔다. 몇 주 후 같은 선생님이 연이어 가르치는 하우스 클래스에도 들어갔다. 처음 보는 장르라 어색했지만 그것도 금방 적응되었고, 더 이상 거울에 보이는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게 되었다. 나를 어떻게서든 표현해야 하는 외향인 기질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하… 내향인인 척 사느라 힘들었구나…'
우리는 새로운 것에 은근히 구원을 바란다. 춤을 배우며 나도 모르게 그런 환상을 품고 있었나 보다. 몸이 자유롭게 표현되면 마음속 응어리가 구원받을 것이라는 환상. 역시나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두 달이 지나고 새로운 것을 배우는 흥미가 익숙함으로 바뀌자, 내가 생각한 마음속 응어리가 무엇이고 어떤 구원을 바란 것인지 천천히 살펴보았다. 내가 엄마이기 때문에, 유럽에 사는 아시아인이라는 이유로 은근한 자기연민을 품고 있었고 '춤'이 어떻게든 돌파구가 될 것이라는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기연민도, 외부에 존재하는 어떤 돌파구도 모두 환상이었다. 모두 내가 만든,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자기연민 스토리였다.
대학을 가면 내 현실이 바뀔 것이라는 믿음. 대학원을 가면,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그다음엔 또 뭐가 있지? 월 1000만 원을 벌면 어떻게 될 것이라는 환상. 이미 많이 부숴왔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자기연민의 끈을 아직도 놓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춤을 배우면 내면의 어둠이 조금 걷힐 줄 알았는데… 사실 내면을 더 들여다보는 기회를 주었을 뿐 직접적인 해결책이 되지는 않았다.
자기연민이 나에게 주는 달콤한 것들을 이제 포기할 시간이 되었다. 작은 내 모습을 피하기만 하면서 핑계 대는 것을 그만두어야 한다. 자기연민을 내세우며 남에게 연민, 혹은 사랑이라 착각할 수 있는 시선을 받는 것도 포기해야 한다. 진정으로 내가 즐기고 사랑하는 음악과 움직임을 즐기는 태도로 임할 것이다. 무엇을 하느냐보다 어떻게 하느냐—그 태도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춤을 통해 배웠다.
현재는 시작했을 때보다 더 많은 시간을 춤을 배우는 데 쓴다. 테크닉도 좋지만 기본과 음악을 즐기며 표현하는 자유를 달콤하게 배워가고 있다. 얼마 전 일본 레전드 하우스 댄서의 워크숍도 다녀왔다. 그의 춤을 보며 형태와 색, 질감으로 표현하는 미술이 사람의 몸에서도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감기 몸살이 걸렸을 때도 춤 수업을 빠지지 않을 만큼, 현재 가장 사랑하는 활동이다.
춤이 내게 가르쳐주는 것은 계속 변할 것이다. 처음 10번 패스를 끊었을 때와 지금이 다르듯, 다음 달도 다음해도 다를 것이다. 그게 좋다. 구원을 기대하지 않으니 더 자유롭다.

쿠쿠치
생각만 해도 슬픈 음식
"여기 들어오는 너희는 모든 희망을 버려라." 장엄한 저음의 목소리가 안개처럼 깔렸다. 오디오북 속의 단테도 파를 써는 나도 지옥의 문을 지나고 있었다. 눈물 콧물 샘을 활짝 개방한 채 파와 사투를 벌이는 배경 음악이 단테의 <신곡> 지옥 편이라니. 제법 잘 어울린다. …
걱정여사의 딸로 태어났지만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할 일이 없겠네." 티베트의 격언이자 어느 일본인 심리상담가의 책 제목이고, 사직동에서 오랜 시간 짜이를 팔고 있는 그 가게 앞 입간판에 적힌 글귀이기도 하다. 어느 영화의 "루이즈가 그러는데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선 그저 마음 편히 먹고 흘러가게 두…
상관 없는 거 아닌가?
한국의 축축한 공기에 젖은 담배 냄새가 나는 인천공항. 한국에 왔다. 2년 만이다.한국의 공기는 맑은 날에도 곧 비가 올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기뻤다가 슬퍼져버린 젊었던 날의 기억 같다고 할까.. 감성적인 것이 꼭 나이 탓인 것만 같다. 도착하고 며칠 후 우리는 제주에 머물렀다.첫째 …
가장 크게 웃은 날
"미술관 오픈런이라니." 자고로 미술관은 시간의 굴레에서 벗어나 유유자적 떠다녀야 제맛이거늘. 설렘의 핏기를 뺀 심드렁한 목소리가 삐져나왔다. 모처럼 볕이 좋은 토요일, 오전 10시의 청량함을 머금은 공기가 제법 차가웠다. 숙박비를 아끼려 전날 심야버스를 택한 리스크는 컸다. 옆자…
눈부시게 빛나는 연휴를 보내며
긴 연휴가 지났다. 몇 년 전부터 수많은 직장인이 손꼽아 기다렸다는 2025년 추석 연휴였다. 개천절인 10월 3일 금요일을 시작으로 10월 10일 하루만 휴가를 내면 열흘 가까이 내리 쉬는 꿈의 연휴에, 나 역시 유급 휴일을 조금은 즐기는 반쪽짜리 직장인일 줄은 미처 몰랐다. 모처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