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문이 슬며시 열린다는 2025년 8월 7일이 지나고 얼마 후 퇴근길이었다. "아, 이제 좀 살 것 같다. 바람이 꽤 시원해졌네요."라는 내 말에 동료는 "하지만 아직 29도가 족히 넘어요. 그렇잖아도 많은 사람들이 날씨가 시원해졌다고 말하지만 사실 아직은 30도를 오가는 더위거든요. 벌써 다들 적응해 버린 모양이에요."라고 답하며 웃었다.
그로부터 한 달이 다 되어가는 9월 2일 아침, "엄마 숀 이쪽, 아빠 숀 이쪽"하며 어린이집을 향해 걷는 동안 바람이 꽤 시원하여 '이제는 정말 가을인가!' 하였으나 이내 28도를 넘기는 날씨. 여름에게 "빠빠이"를 말하며 손을 흔들기엔 아직 이른가 보다.
그래서 적어보기 시작한 오늘의 글은 '2025년 여름 하이라이트'랄까. 자랑하고 싶어 아껴두었던 짙은 초록으로 빛나던 순간을 기록해두려 한다. 지극히 개인적인 추억을 떠올리며, 이 길고 긴 여름에 여러분은 무엇을 하며 어떻게 지내셨는지 혼자서 질문을 건네며 말이다.
장면 #1. 여름, 입맛
맛있고, 건강하고, 즐거운 일요일 점심!
10년 가까이 알고 지낸 친구가 오랜만에 한 자리에 모였다. 서로 맡은 일을 더 잘 해내고 함께 품은 뜻을 펼쳐보고자 시작한 모임이지만, 지금은 각자의 길을 걷다 보니 한데 모여 수다 떨 기회를 만들기가 쉽지 않다. 연말이나 연초 혹은 누군가에게 좋은 일이 생기면 그걸 핑계로 모임을 갖는, 마치 고등학교 동창 같은 느낌이랄까. 무심한 듯해도 만나면 반갑고, 짓궂은 말로 골탕을 먹이면서도 서로를 진하게 응원하는 그런 사이.
한 친구의 새로운 출발을 축하하고 응원한다는 명목으로 여름의 초입에 만남을 가졌다. 호스트 친구는 유난히 정도 많고 재주도 많아 우리에게 맛 좋은 음식을 정성스레 준비하여 제대로 대접해 주었다. 건강한 식사와 시시껄렁한 이야기. 네 시간 가까이 흐른 뒤, 나는 우리가 다른 어디에도 쓸 일이 없을 잡담을 끝없이 이어갔다는 사실을 깨닫고 외쳤다.
"우리가 하는 말들 말이에요. 정말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말로 네 시간이나 수다를 떨다니!"
그게 뭐 어떠냐, 무엇이 나쁘냐 묻는 친구들에게 나는 "그게 참 좋아서 한 말"이라 답했다. 다른 무엇이 아니라 서로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오롯이 즐길 수 있다니 얼마나 소중한 만남인가! 우리가 모여 뭐라도 했다면 뭐라도 되었겠지만, 이 느슨한 연대는 그 자체만으로도 가볍게 스며드는 위로이자 든든한 지지대다. 살아가며 마주칠 다양한 계절에 이들이 쭉 동행하기를 바라본다.
낭만, 낭만 또 낭만!
장면 #2. 청춘의 바다
덥지만, 더워도 너무 덥지만 여름이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만약 폭염과 폭우로 고통받는 이들이 없다면, 에어컨을 켜지 않아도 버틸 수만 있다면 몇 달이고 여름이 이어지기를 바랐다. 솔직히 말하자면 여름이 아니라 방학이 가는 게 아쉬운 거다. 여러 개의 일을 하고 살다 보니 그중 하나는 내게 여름과 겨울에 두어 달씩 방학을 준다. 일주일에 하루쯤은 아기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나만의 시간을 가질 기회가 생기는 거다.
게다가 방학이라는 단어의 앞에는 겨울보다 여름이 서야 어울린다. '여름방학'에는 매미 소리, 풀벌레 소리, 달콤한 수박, 따가운 햇볕, 무성한 나뭇잎, 시골집 마당에서의 소꿉놀이, 주일학교 여름 캠프, 더위가 식어가는 늦은 밤바람에 실린 풀 냄새, 산사 입구 옆 폭포 소리와 같은 감각이 담겨있다. 겨울방학이라면 기껏해야 껍질이 한 무더기 쌓이도록 귤을 까먹은 기억 정도다.
서해 바다는 하늘이 몹시 푸르른 날에만 파랗다.
어라? 여름방학의 그 많은 기억에 바다가 없네. 여름과 방학만큼이나 여름과 바다는 참 잘 어울리는 단어인데 말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지금이야 강릉까지 KTX가 다니고 제주를 오가는 비행기 값이 꽤 저렴해졌지만, 아직 내가 여름방학을 만끽하던 어린 시절에는 서쪽에 사는 우리 가족이 바다에 갈 방법이 마땅치 않았던 게 이유인 듯하다. 엄마, 아빠가 아니라 친구들과 바다 여행을 다닐 수 있게 된 뒤로도 붐비는 게 싫어서 여름 바다에는 좀처럼 가지 않았다.
섬에 살아도 해변에 가는 일은 드물다. 청소년이 많이 찾기로 유명한 을왕리 해수욕장에 차로 가면 20분,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공항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가야 하니 1시간 정도 걸린다. 운전면허가 없는 내게 바다는 가깝지만 멀다. 게다가 눈, 비가 내리지 않고서야 늘 푸르른 동해 바다에 비해, 서해는 대체로 회색빛이다. 물때가 맞지 않으면 집 나간 바다를 하염없이 기다려야 하고, 을왕리 조개구이집의 호객행위는 길에 잠시도 서있을 수 없을 정도로 무시무시하다.
그날은 내 마음에 무슨 바람이 불었던 걸까? 바다에 가야지 마음을 먹고 공항으로 향했다. 여행객의 설레는 마음을 얻어먹고는 버스를 탔다. 차 안에는 나 말고도 손님이 여럿이었다. 당초 마시안에 내려 손님이 적은 카페에 들어가려 했는데, 을왕리로 향하는 듯한 젊은 무리 여럿을 보니 사람이 붐비는 해수욕장에 가고 싶어졌다. 파라솔이 늘어선, 수영에 서툰 사람이 튜브에 몸을 맡기고 바다를 둥둥 떠다니는 바다를 보고 싶었다.
파라솔, 갈매기, 모래밭
바다에는 청년부터 노년까지 다양한 사람이 각자의 방식으로 여름을 즐기고 있었다. 바닷물에 몸을 푹 담근 사람은 대부분 20대였지만 70대로 보이는 이가 두엇 있었다. 각자의 청춘을 만끽하는 모습이, 나의 행복이 되었다. 생각해 보면 뜨거웠던 여름이 내게 더할 나위 없는 계절로 남은 건, 내가 아닌 다른 이들의 덕분이다.
올 여름 장식장을 새로이 장식한 트로피,
2025 : 무용한 대화, 소금기 어린 물에 반짝이는 타인의 시간
한도리
N잡러
세 명이 한 가족, 섬에 살아요. "좋은 일 하시네요!"라는 말을 자주 듣는 업종에 종사하고 있어요. 주위를 둘러보며 걷기를 가장 좋아해요. 때로는 영화를, 소설을, 친구의 이야기를 걸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