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에서 보낸 한여름

2025. 09. 01by오자히르

그리스에서 맞이한 첫 여름은 청량했다. 뜨거운 태양과 건조한 공기,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투명에 가까운 바다와 시원하게 부서지는 파도. 여름이 아름다운 계절이라 느낀 건 처음이다. 바다는 여름에 잠시 보는 게 전부였는데, 배 위에서 한가로이 커피와 음악을 즐기고 친구와 연인, 가족과 대화하는 낭만적인 삶도 있었다. 오랜 친구처럼 편안하고 당연하게. 


그리스인은 주말이면 남녀노소 대부분 해변에 간다. 어릴 적부터 일상에서 아름다운 바다를 보고 자랐기에 늘 여유롭고 친절한지도 모르겠다. 자연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언제나 반겨주니까. 한국처럼 가야 할 곳도, 해야 할 일도, 사야 할 물건도 많지 않은 그리스에서 바다는 자연이 준 최고의 선물 같다. 수심이 깊은데도 맨몸으로 바다에 뛰어드는 모습은 한없이 자유로웠다.


신의 축복을 받은 듯, 그리스에서는 여름 장마에 대비할 필요가 없다. 세로토닌 듬뿍 나오는 쨍쨍한 햇볕이 모든 근심과 걱정을 흡수해 버리니까. 더우면 시원한 바다에 들어가고, 오전과 저녁에는 그늘진 길을 산책하며 여름의 낭만을 만끽한다. 강렬한 햇살을 품고 과일과 곡식은 무럭무럭 자란다. 빨래는 두 시간이면 마른다. 8월이면 아테네 시민들이 휴가를 떠나고 텅 빈 도시에 전 세계 여행자들이 모여든다. 모든 게 서두르지 않고, 애쓰지 않고,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지중해 햇살 아래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볼 때마다 있는 그대로 완벽하다고 느낀다. 레프카다에서 머문 어느 민박집 소년에게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미소를 보았다. 매일 아름다운 바다와 일몰을 보고 살아간다면, 이토록 순수한 미소를 가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자킨토스 섬의 작은 와이너리에 방문한 날, 가족 대대로 가꿔온 포도밭에 자부심을 느끼고 친절히 설명해주는 주인의 눈빛은 소녀처럼 예뻤다. 자신이 가진 걸 소중히 여기는 마음까지도. 


이번 여행에서 가장 많이 느낀 건 살아있다는 감각이다. 책상 앞에서 결코 느낄 수 없는, 세상에 존재한다는 느낌.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과 끝없이 펼쳐진 바다, 넘실대는 파도, 내리쬐는 햇볕. 살면서 이런 순간을 더 가져야 하지 않을까. 


광활한 자연 앞에 나는 훨씬 더 작은 존재였다. 모든 문제는 사소했다.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내 옆에 사랑스러운 아이가 있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아름다운 해변에 갈 수 있고. 매일 아침 일어날 때마다 감사를 느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한가로이 잔디에 누워 일몰을 즐기는 사람들 앞에서, 과거의 내가 떠올랐다. 매일 숙제처럼 살아가는 삶도 있지만, 축제처럼 살아가는 삶도 있었다. 


최근 <100년 뒤 우리는 이 세상에 없어요> 책을 읽었는데, 유명한 베스트셀러 ‘사소한 것에 목숨 걸지 마라’의 20주년 현대판 제목이다. 이보다 지금 생이 소중해지는 문구가 있을까. 46억 년 지구 역사에서 고작 80년 남짓 살아가는 유한한 존재라면, 나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할까. 남은 소중한 날들을 무엇으로 채울까. 답은 단순하고 명료해졌다. 해야 할 일 목록 가득한 삶이 아닌 있는 그대로 충만한 삶. 서두를 필요도 없고,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아도 괜찮다. 


세상의 아름다움을 구석구석 찾아내 아낌없이 누리고 싶다. 그동안 일하고 육아하느라 챙기지 못한 나를 정성껏 살피고 돌보면서. 따사로운 햇살, 상쾌한 바람과 공기, 아름다운 바다와 노을, 싱그러운 나무와 꽃, 시원한 파도 소리.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누릴 수 있는 행복이 많다. 지구에서의 삶을 경험하라고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면, 삶을 있는 그대로 느껴보고 모든 것에서 감사와 아름다움을 발견하면 된다. 신이 준 선물인 대자연을 마음껏 즐기는 것이야말로 우리 인간이 해야 할 일, 마땅히 누려야 할 기쁨 아닐까. 다시 바쁜 삶으로 돌아간다 해도 마음 한켠을 내어 고요한 바다를 품고 살아가고 싶다.  

 

 


 

 

오 자히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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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히르

번역가

단순한 삶 속에서 지혜와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