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은 따라오지 않아도 삶은 흐른다

2025. 08. 05by기록하는비꽃

공항 대합실. 사람들의 소란스러운 발걸음과 소리 없는 밀침이 한데 뒤엉켜 있었다. 짐을 끄는 바퀴 소리, 초조한 숨결, 손짓 대신 몸으로 길을 터주는 움직임까지, 무질서의 질감이 공기 속에 퍼져 나갔다. 낯설지 않은 풍경이었다. 오히려 이 장면은 익숙했다. 이 익숙함은 곧, 한국에서 점점 멀어지고 우간다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무엇보다도 확실하게 느껴진 건 공기의 밀도였다. 숨이 턱턱 막히던 한국의 한증막 같은 더위는 어느새 사라졌고, 피부를 뚫고 들어오는 냉랭한 바람이 옷깃 사이로 스며들었다. 외투를 꺼낼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 차가운 공기는 마음 어딘가를 건드렸다. 돌아간다는 건 다시 시작한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 시작이 마냥 반갑지만은 않다는 것을 안다. 가까워질수록 그리운 것도 있지만, 그만큼 두려운 것도 있었다. 두 마음이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그저 나란히 앉아 있는 순간이었다.

 

도착은 정오 무렵이었다. 낮 해가 머리 위로 떠 있었고, 공항 문을 나서자마자 익숙한 햇살과 바람이 몸을 감쌌다. 모르는 사람처럼 대했지만, 사실은 이미 알고 있는 풍경. 잠시 숨을 고르고 난 뒤 택시에 올라탔다. 창문은 닫혀 있었지만, 어디선가 흘러들어온 모래 먼지가 코와 목을 찔렀다. 먼지를 털어내듯 기침이 쏟아졌고, 그 안에서 겨우 숨을 고를 수 있었다. 짐칸에 실린 가방처럼, 몸도 마음도 이곳에 다시 실려 들어오고 있었다. 조수석 창문 너머로 펼쳐진 풍경은 여전히 메말라 있었고, 오래전 그대로였다. 먼지가 흩날리는 도로와 이따금 튀어나오는 돌부리, 허공에 매달린 전깃줄들, 그리고 아스팔트 가장자리에 주저앉은 사람들까지도 변함이 없었다. 그 와중에 떠오른 한 생각. 한국에서는 아무 증상 없던 주안이의 비염이, 오늘로 다시 시작되겠구나. 먼지가 가득한 이곳의 공기는 휴식이 아닌 전조였다. 어김없는 시작이었다.

 

잠은 당연히 제대로 못잤다. 비행기에서는 원래도 깊이 잠들지 못하는 편이지만, 이번엔 더 심했다. 영화도 지루했고, 음악도 귀에 닿지 않았다. 기내식의 맛도 기억나지 않았고, 사람들의 표정도 흐릿했다. 오랜 시간 공중에 떠 있다가 지상에 닿자마자, 무거운 몸을 침대에 던졌다. 그날 밤은 기절하듯 쓰러져 잤다. 그러다 다음 날 밤부터 다시 뒤척이는 밤이 시작되었다. 개 짖는 소리, 어딘가 날아다니는 벌레의 날갯짓, 문틈 사이를 스치는 바람. 평소라면 배경음처럼 흘려보냈을 소리가 밤마다 경보처럼 울려 퍼졌다. 자다 일어나고, 다시 눕고, 또 깨어나고. 몸은 계속 깨어 있었고, 마음은 그보다 더 긴장해 있었다. 이상하리만치 예민한 밤의 감각은, 잠이라는 단어를 허락하지 않았다. 모두가 자는 시간, 과거의 한 장면만이 반복해서 재생되었다. 떼강도 사건. 누구도 그날을 다시 말하지 않았지만, 기억은 여전히 그 밤에 머물러 있었다. 문밖에 아무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문틈으로 스미는 공기조차 의심하게 되는 밤. 반복되는 불면은, 다시 여기에 있다는 실감을 날카롭게 안겨주었다.

 

눈을 뜨자마자 할 일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글을 써야 하고, 대학원 수강도 시작해야 했다. 책상 위에 덮어둔 메모들은 다시 펼쳐야 하고, 정리하지 못한 서류들과 참고 자료도 손봐야 했다. 손에 익은 작업임에도 불구하고, 하나하나가 낯설게 느껴졌다. 머리는 익숙하다고 말하지만, 손과 마음은 기억하지 못하는 듯 움직이지 않았다. 우간다의 시간은 언제나 해야 한다라는 말로 시작되었고, 그 문장은 늘 인내라는 말과 나란히 붙어 다녔다. 해야 한다, 견뎌야 한다, 버텨야 한다. 책임이라는 단어는 혼자서 걸어가야 하는 무게였고, 감정은 늘 그 뒤에 따라와야 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문장이 끝나기 전에 자꾸만 물음표가 붙는다. 이대로 괜찮은가, 또 이렇게 다시 시작해도 되는가. 흔들리는 나뭇가지처럼 마음은 한 자리에 머무르지 못했고, 생각은 바람처럼 흩어졌다.

 

그 사이, 한국에서 보낸 시간이 떠올랐다. 분명 잘 쉬었다고 생각했는데.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과 웃었고, 좋아하는 장소들을 찾아다녔고, 꼭 필요했던 위로도 받았다. 몸도 마음도 한껏 쉬었고, 다시 시작할 준비가 되었다고 믿었다. 그런데 그 쉼은 돌아오자마자 순식간에 휘발되고 말았다. 입고 있던 옷에서 냄새가 빠지듯, 그 감정의 온기도 빠져나갔다. 뿌리 내릴 시간도 없이 날아가 버린 위안. 낯선 땅이 주는 무게는 여전히 너무 무거웠고, 지금 이곳이 삶의 자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려 할수록 마음은 점점 멀어졌다. 여기 있다는 감각과 여전히 어딘가 떠 있다는 감각이 동시에 존재하는 시간.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는 듯하면서도, 모든 것이 흔들리고 있는 그런 상태였다.

 

일상은 다시 제 자리를 찾으려 한다. 아침이면 아이들의 식사를 챙기고, 세탁기를 돌리고, 청소하고, 돌아서서는 커피를 내리고, 메일을 확인하고, 책상 앞에 앉는다. 움직이고는 있지만, 그 안에 감정의 온도는 비어 있다. 마치, 누군가가 꺼버린 난로처럼. 멈추면 비로소 그 공허함이 또렷하게 다가온다. 다시 이곳에서 살아내야 한다는 사실 앞에서, 몸은 순응하려 애쓰지만, 마음은 아직 머뭇거리고 있다. 누가 옳다 할 수도, 그르다 말할 수도 없는 나날들. 단순한 적응이라 말하기엔 너무 많은 것이 변했고, 돌아왔다고 말하기엔 아직 머물지 못한 감정이 있다.

 

그럼에도 하루는 흘러간다. 해야 할 일들은 기다려주지 않고, 손은 자동으로 움직인다. 글을 쓰고, 먼지를 닦고, 커피를 내리고, 다시 글을 쓴다. 감정이 따라오지 않아도 삶은 돌아간다. 혼란스러운 마음은 잠시 접어두고, 오늘 해야 할 일에 집중하는 것. 그게 지금 할 수 있는 전부라고,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게 우간다에서의 삶이다. 완전하지 않아도 괜찮은 하루. 감정이 머뭇거려도 몸이 먼저 움직이는 하루. 매일 같이 흙먼지로 덮인 길을 걷고,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빗소리에 위로받고, 정전과 단수 사이에서 숨을 고르며 살아가는 날들. 그렇게 또 하나의 계절이 만들어질 것이다.

기록하는비꽃

작가

우간다에서의 일상을 글로 씁니다. 『일상의 평범함을 깨우다』를 펴냈고, <포포포매거진 뉴스레터>에 삶을 기록 중입니다. 좋아하는 것을 덕질하며, 해낙낙하게 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