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장면이 돌아왔다. 냄새도, 소리도, 그 공간에 흐르던 공기까지. 다시는 닿지 않을 줄 알았던 시간의 조각들이 손에 잡힐 듯 선명해지는 순간은 늘 예고 없이 찾아온다. 이번엔 정말 그랬다. 20년 만에 다시 찾은 방송국, 그 문을 들어서자마자 익숙한 냄새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복도 끝에서 반가운 얼굴이 다가왔다. 여전히 그 자리에 계신 피디님. 반갑다고, 잊지 않았다고, 웃으며 건네는 인사에 마음이 스르르 풀렸다. 그리고 그 인사를 따라 잊고 있던 장면들이 하나둘 되살아났다. 그 시절, 일하는 게 재미있었다. 아니, 그 시간이 곧 삶이었다. 대본을 들고 뛰어다니고, 사연을 읽고 정리하고, DJ에게 메모를 건네던 시간. 낯선 청취자들의 목소리를 만나고, 때로는 울고 웃으며 마이크를 사이에 두고 세상과 이어지던 나날들. 그 모든 순간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라디오라는 공간은 독특하다. 카메라는 없다. 눈빛 대신 목소리, 표정 대신 숨결, 이미지 대신 음악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사람들의 사연이 가득한 원고지와 무심한 듯 흐르지만 정교하게 짜인 선곡표, 그리고 방음벽에 둘러싸인 작은 공간 안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이야기.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공감과 연결의 시간. 방송 중, 유리창 너머 스튜디오 안을 바라보았다. 마이크 앞에 앉은 DJ의 모습, 그 옆에서 조용히 시간을 재고 있는 피디, 그리고 한쪽 벽면, 작가가 앉는 테이블. 눈이 그 자리에 멈췄다. 아, 저 자리가 바로 그 자리였다. 한때 매일같이 앉아 있었던 곳. 방송을 들으며 원고를 넘기고, 청취자 사연을 정리하던 자리. 한 곡 한 곡 사이를 잇기 위해 수없이 지웠다 썼다 하던 흔적들이 아직도 거기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때의 나를 바라보는 듯했다. 사연을 읽으며 울컥했던 어느 날, 갑자기 전화 연결이 됐던 청취자의 떨리는 목소리, 노래 한 곡에 위로받았다는 말. 아무것도 아닌 하루가 누군가에겐 전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그 시절엔 조금씩 배워가며 일했다. 그 마음이 낯설지 않았다.
스튜디오는 조금 바뀌었지만, 그 숨결은 그대로였다. 음악이 흐르는 순간마다, 한때의 기억이 포개어져 있었다. 마치 오래된 꿈속을 걷는 기분이었다. 눈을 감으면, 그 안에서 여전히 무언가를 만들고, 나누고, 기록하고 있는 이들의 숨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곳은 하루 대부분을 보내던 자리였다. 일터이자 놀이터, 배움의 공간이자 생존의 현장이기도 했다. 늘 누군가를 만나고, 새로운 것을 생각하고, 세상을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바라보려 애썼던 날들이 그 안에 담겨 있었다. 지나간 시간이 아련하기보다 따뜻하게 느껴진 건, 그 시절의 열정이 여전히 남아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다시 일하고 싶다. 다시 만들어보고 싶다. 다시 방송 시간에 맞춰 글을 쓰고, 누군가의 이야기를 기다리고, 음악을 고르며 하루를 보내고 싶다. 마음은 어느새 달려가고 있었다. 마음속에서 불이 켜졌다. 오래된 조명처럼,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하지만 현실은 다른 방향을 가리킨다. 머지않아 다시 우간다로 돌아가야 한다. 잠시 머문 한국의 여름은 그렇게 지나가고, 다시 선교지의 삶으로 돌아가는 날이 다가온다. 떠나온 곳에서는 누군가의 삶이 기다리고 있고, 아이들이 있고, 이곳과는 전혀 다른 언어와 공기와 시간이 있다. 거기서도 매일을 살아내야 한다.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 애써야 하고, 그곳에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 두 마음이 충돌했다. 그리고 충돌은 고요한 파문처럼 가슴에 번졌다. 이곳에 계속 있을 수 있다면,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그러나 떠나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마음은 길을 잃고, 발끝은 머뭇거린다. 다시 일하고 싶다는 마음이, 지금 있는 자리의 의미를 되묻게 했다.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잠시 머무른 하루가 너무 많은 질문을 안겨주었다. 그런데도 마음 한쪽은 고마웠다. 다시 설렘을 느꼈다는 것. 아직 그 마음이 남아 있었다는 것. 그리고 누군가 그 시간을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 한 사람의 삶이, 어딘가의 장면으로 남아 있다는 건 생각보다 큰 위로였다. 아무도 모를 줄 알았던 시간이,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의미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 뭉클했다.
무언가를 만드는 일은 언제나 사람을 향해 있었다. 그 일을 하며 누군가를 떠올리고, 누군가에게 닿기를 바랐고, 언젠가는 이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작은 빛이 되기를 꿈꾸었다. 꼭 거창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하루를 조금 덜 외롭게 만들어주는 노래 한 곡이면 충분했다. 어떤 말은 오랫동안 잊히지 않았고, 어떤 음악은 그 시절을 통째로 기억하게 했다. 그래서일까. 다시 그 자리에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은, 다시 누군가의 하루에 조용히 닿고 싶다는 바람이기도 했다. 목소리를 담아 보낸 사연이 어딘가의 아침을 밝히고, 한 곡의 음악이 어깨를 다독이듯 흘러가는 장면. 그것이 가능했던 시절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졌다.
지금은 잠시 멈춰 선 시간일지 몰라도, 그 마음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언젠가 다시, 또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할 수 있기를. 떠난다 해도, 그 마음도 함께 데려가면 된다고, 그렇게 다짐해보았다. 그래서 그날의 방송국은 단지 추억의 장소가 아니었다. 그것은 마음의 스튜디오였다. 다시 불이 켜진, 기억과 꿈이 교차하는 공간. 그 안에서 또 다른 이야기가 시작될 수 있으리라는 예감이 있었다. 떠나야 한다 해도, 그 마음까지 놓아야 하는 건 아니니까.
누군가 이 글을 읽고 있다면, 가끔은 이렇게 물어봐 줬으면 한다. ‘요즘은 어디에 있나요? 어디에 마음이 머물고 있나요?’ 그 질문이 누군가에게는 자리를 지키는 힘이 되고, 또 누군가에게는 다시 걸을 용기가 될 수 있으니까. 때로는 단 한 줄의 인사로 마음의 불빛이 켜지기도 하니까.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기록하는비꽃
작가
우간다에서의 일상을 글로 씁니다. 『일상의 평범함을 깨우다』를 펴냈고, <포포포매거진 뉴스레터>에 삶을 기록 중입니다. 좋아하는 것을 덕질하며, 해낙낙하게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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