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6월. 봄의 선선한 바람이 아직 머무는 가운데, 여름의 따가운 태양이 성급히 얼굴을 내민다. 이 절묘한 계절의 경계선 위에서 프랑스는 과거와 현재가 겹쳐지는 마법 같은 시간을 맞이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특별한 순간은, 파리 동쪽의 작은 중세 도시 프로방(Provins) 에서 펼쳐지는 ‘메디발 축제(Fête Médiévale)’이다.
불어로 메디발(Médiéval) 은 중세를 뜻한다. 이 축제는 단순한 테마 행사가 아니라, 중세시대의 생활과 문화, 역사적 분위기를 가능한 한 사실적으로 재현해낸 시간의 복원이다. 매년 단 한 번, 6월 중순에 열리는 이 축제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프로방에서 개최되며, 전 세계의 중세 애호가들을 불러 모은다.
프로방은 파리에서 기차로 약 두 시간 거리. 접근성은 좋지만, 도시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파리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에 압도당한다. 돌담과 나무로 지어진 집들, 성벽과 종탑, 좁은 골목길들은 12~13세기 프랑스의 시간 속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이곳은 과거 샹파뉴 백작령(Comté de Champagne) 의 중심지로, 국제적인 시장인 샹파뉴 시장(Marchés de Champagne) 이 열리던 무역의 요충지였다. 당시 유럽 각지의 상인들이 이곳에 모였고, 은행이 생겨날 정도로 경제적으로도 큰 번영을 누렸다.
성벽을 지나, 작은 나무다리를 건너며 마을에 들어섰을 때, 나는 ‘시간이 멈췄다’는 표현보다 ‘시간이 켜켜이 쌓여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지금은 거주민이 많지 않아 조용하지만, 한때 이곳은 상인들과 사람들로 북적이던 활기찬 도시였다. 또 다른 시기에는 전쟁과 피로 물든 역사도 품고 있다. 이곳이 겪어낸 수많은 이야기는 마치 오래된 책처럼 나의 궁금증을 자극했다.
프로방이 다른 중세 도시와 구분되는 가장 독특한 점은, 이 도시에 존재하는 거대한 지하터널이다. 고고학자들은 이 미로 같은 터널을 ‘프랑스 중세판 도시 미궁’이라 부르며, 아직까지도 완전히 탐사되지 않은 미스터리한 공간으로 여긴다. 지하터널은 ‘잔다르크’가 다녀갔다는 교회, 그리고 도시의 랜드마크인 세자르 탑(Tour César) 과도 연결되어 있다고 전해진다. 상인들의 거래소, 피난처, 비밀 종교 의식 장소로도 쓰였던 이곳엔 성배, 별, 삼각형, 십자가, 기하학적 무늬의 낙서들이 남아 있다. 학자들은 이 흔적들이 중세의 템플 기사단 또는 프리메이슨의 활동을 암시하는 것이라 본다.
무역의 번영과 함께 도시를 방어하기 위해 세워진 세자르 탑은, 지금도 마을을 굽어보고 있다. 그 이름은 로마의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에서 유래했으며, 로마 제국의 위엄을 기리기 위한 상징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다시, 축제로 돌아온다. 매년 이 도시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중세 의상으로 갈아입고 나타난다. 기사, 수도사, 여왕, 상인, 광대, 음악가들이 거리를 메우고, 마치 800년 전으로 돌아간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전 세계에서 모인 이들은 자국의 중세 의상으로 축제에 참여해, 다양한 문화권의 중세를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중세식 음악, 연극, 서커스를 감상하고, 통 돼지고기 구이와 진한 치즈, 와인을 곁들여 즐기는 만찬은 축제의 백미다. 이곳에서는 모두가 잠시 ‘살아본 적 없는 시대’를 살아보는 경험을 한다. 그 순간은 영화 킹덤 오브 헤븐의 한 장면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소설 다빈치 코드 속, 미스터리한 비밀을 풀어가는 로버트 랭던 교수가 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프로방의 6월, 메디발 축제는 단순한 볼거리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살아 있는 역사이자, 사람들이 시간 여행자가 되어 과거를 걸어보는 하나의 의식이며, 잊혀진 이야기와 신비가 어우러진 축제이다.
그곳에 다녀온 후, 나는 묻고 싶어졌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도 언젠가, 누군가에게 이런 축제가 될 수 있을까?
프랑스의 소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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