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소하다면 협소하고, 넓다면 넓었던 내 인간관계의 공통점은 최대한 개인 위주로 기분이 좋으면 만나고,
아니면 말고 식의 기분파 만남이 가능했다는 점이다.
야, 그거 누구 오는데? 걔 와? 나 그럼 갈래. 특정인을 만나기 위한(혹은 피하기 위한) 만남도 가능했다.
"지금 되는 사람?"
"나 돼! 만나자! "하는 급번개 모임도 물론 가능했고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덧 과거의 일이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약속이 정해지면 주최자가 누구이든 시간을 맞췄다면 만나야 하는 관계가 생겨나고 있다.
바로 아이 친구 엄마들 모임이다.
나와 마음이 맞는지, 동년배인지, 취향은 같은지, 가치관이 같은지 등은 일단 차치하고, 아이의 나이가 최우선으로 고려되는 모임.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조리원동기, 문화센터친구, 오픈카톡친구, 맘카페친구, 어린이집엄마들,
동네놀이터엄마들, 여행갔다 만난 엄마들 등 다양하게 만남이 많아지고 있다.
그리고 전화번호 좀, 하는 헌팅 아닌 헌팅의 횟수도 많아지고 있다.
사람들을 꽤나 잘 기억한다고 자부했던 나인지라, 그동안 전화번호부에 지인을 별명+특징으로 저장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만난 장소/아이 이름/아이 나이/엄마 이름/엄마 나이 등 최대한 저장할 때 정보를 다 넣는 편이다.
그래야 아이와 함께 뇌를 낳았다고 지칭되는 건망증 상태에서 상대방을 기억해내기 쉽기 때문이다.
가평/홍길동/6/김**/36
카톡에 새롭게 뜨는 상대방의 프로필은 거의 데이터화된 수준으로 저장되곤 한다.
과거의 내 인간관계가 서로의 자아를 까놓고 만나는 호감 섞인 사이라고 하면,
요새의 만남은 서로의 자식을 까놓고 만나는 의문 섞인 사이다.
말했듯이 아는 것은 아이의 나이 뿐이다.
언니는 언닌데 몇 살 언니시더라, 동생은 동생인데 이름이 뭐더라.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것도 많고 유일하게 자식이 공통점으로 엮인 사이다보니,
깜빡 착각하면 말실수하기 일쑤고 조금 선그으면 멀어지기 쉽다.(그래서 전화번호부 이름이 중요하다!)
아이 친구 엄마가 나랑 동년배에다 취향마저 잘 맞고 개그코드도 잘 맞는 경우에는 집이 멀고,
아이 친구 엄마가 집이 가까우면 나이대가 다르거나 관심사가 다르고 개그코드도 무척 달라 뻘쭘하게 헤어지곤 한다.
게다가 아이가 좋아하는 친구와 내가 좋아하는 친구는 또 극명하게 달라서,
나는 같은 성별의 친구와 즐겁고 사이좋게 놀아줬으면 좋겠는데 다른 성별의 친구와 이야기가 잘 통하는지
재잘재잘 그 친구가 이랬고 저 친구가 이랬고 하며 이야기한다.
들은 바에 따라 엄마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또 그 친구가 가진 우정의 작대기는 다른 쪽을 가리키기도 해서 괜히 서운하기도 하다.
그래도 다행인 건 아이는 점차 성장해서 자신만의 친구를 만들어갈 거라는 점이다. 문제는 나다.
요새 활발한 MBTI 검사 결과로 ENFP 결과치를 받았을 때 끄덕거렸다.
쉽게 말하면 저 유형은 인간 골든리트리버라고 한다.
사람을 너무 좋아하는 내 성정에는 힘든 상황을 얘기해주는 상대방이 너무 고마워서
상대방의 상황을 들었을 때 가만 있지 않고 또 다가간다.
나는 다가가는데, 막상 상대방이 원한 것은 순간의 푸념을 통한 감정해소였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머쓱해진다.
머쓱함이 몇 번 반복되고 나면, 상대방도 부담스럽고 나도 서운해져서 서서히 멀어진다.
멀어지고 나면 괜히 아쉬워진다. 그래서 조금은 고민하게 된다. 나도 그냥 가볍게 생각했으면 되는걸 진중하게 생각해버린 탓일까.
몸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지는 거라던 말은 그 이도 참인지 모르겠지만,
몸에서 가까워지니 마음에서도 가까워져서 오히려 내 친구들보다도
현재의 아이 친구 엄마들이 내 현재 상황을 더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내 아이의 특성도 이모를 자처하는 친구들보다,
심지어 진짜 혈족인 아이의 삼촌보다 훨씬 더 많이 알고 있다.
그러므로 때때로는 선을 넘어 내 깊은 고민, 내 심적인 힘듦까지 알아주고 위로해주길 바라게 되는 것이다.
맘카페에 올라오는 인간관계 고민 글들을 보면 가장 고민해봤자 소용없는 인간관계로 아이 친구 엄마를 얘기한다.
대체 그렇게 쿨하고 시크한 답변을 달기까지 이 엄마들은 얼마나 많이 데였고, 달궈진걸까.
그렇지만 소용없다고 말하기엔, 내 육아에서 겪는 시시콜콜한 문제들과 감정적인 폭을 이해해주는 사람들은 아이 친구 엄마만큼 말이 잘 통하는 사람들이 없다.
공통기관에 보내고 있는 사람들은 공통관심사가 더 있으니 순식간에 화르르륵 화력도 치솟는다.
그리고 시댁이야기를 꺼낼 때면 그렇게 하고 또 해도 할 말이 남아 성토대회를 열어도 될 법하다.
그런 즐거운 이야기를 할 때면 유년시절 단짝친구랑 대화하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금세 착각임을 깨닫는다. 그렇지만 갑자기 인생을 걸만한 고민,
그리고 감정적인 교류가 진행될 때는 다들 멈칫하게 된다.
때로는 개입하고, 때로는 참견하지만 실은 아이만 챙기기도 버거운 입장이기에
약간의 감정적인 교류는 슬쩍 넘겨버리는 경우가 많다. 나 역시도 그렇다.
그래서 거리조절에 늘 실패해 상처받기도 하고, 무심해지기도 한다.
상대방은 원치 않았는데 나만 다가갔을 경우는 더 그렇다.
그리고 상대방 역시도 틀림없이 그런 경험이 있으리라.
그럼 과연 아이 친구 엄마는 사소하고 소소한 일상까지 공유하는 내 친구인건가,
아님 감정의 교류까지는 묵살하니 내 친구가 아닌건가.
김서방네 지붕 위에 콩깍지가 깐 콩깍지냐, 안 깐 콩깍지냐의 발음 교정 문장만큼이나 마음 쓰이는 질문이다
김작가
회사원
A만 인정받는 세상 이야기 속에서 B안을 끊임없이 만들고자 하는 김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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