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에서 엄마의 삶, 무덤을 박차고 나가다

2025. 05. 27by에스텔


#24  프라하 육아일기

해외에서 엄마의 삶 <무덤을 박차고 나가다>

 

 

 

몹시 아팠다. 아파서 울기도 했는데, 어쩜 어디 기댈 곳 하나 없을까 싶어서 아이들을 픽업하는 길목에서 울컥울컥 눈물이 올라왔다. 엄마의 삶은 어디서나 멈춰짐이 없어야하지만, 아픈 동안 아이들은 내리 방치하였다. 정말로 기력이 없었고, 아이들 겨우겨우 밥먹이고 학교로 데려다 주고, 나는 감자미음을 먹고 침대에 벌러덩 누워 죽은듯이 잠을 잤다. 도대체 병명이 뭘까? 엄마 몸살? 이방인의 열병? 해외생활 몇년차가 되면 생활이 익숙하고 편해지면서, 긴장이 녹아나오고 긴장이 녹은 몸엔 그동안의 힘듦이 고스란히 묵어져 엄마를 기여코 쓰러뜨리고 만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얼다. 알게 모르게 해외에서 외국인으로 살면서 내내 긴장하며 지내고, 잠을 푹 자지 못하는 날들이 많았다. 이 것들의 합이라면 이해가 되었다. 외국에서 외국인으로 사는 삶은 쓰러져 자는 잠을 자는 것 같았다. 어디하나 내 몸 뉘일 곳 없는 떠돌이 신세 같다. 그래서 자주 쓰러져 잠들었다. 누운 곳이 침대고 삶의 여백엔 짙은 외로움이 파고든다. 해외에서 느끼는 외로움은 한국에서 느끼는 외로움과 결이 다르다. 종류가 달라서, 다루는 법도 달라야 했던 것 같다. 한국에서는 나만 멈춘듯 허전한 기분이라면, 외국에서의 삶은 적막한 무덤에 누워있는 것 같다. 처음엔 그 느낌이 낯설어 무덤에 눕지 않으려 발버둥을 쳤지만, 이 삶과 외로움에 익어져 가면서 무덤에 누워 시간을 잘 보내는 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혼자 카페에서 앉아있기도 하고, 공원을 걷기도 하면서 탐색하며 잠영 생활을 했다. 나쁘지 않았다. 모든 자극이 배제되고 음소거된 공간에서 느리지만, 이 정도면 썩 괜찮은 것 같은데? 

 

아픈 와중에도 예정된 일을 해야했다. 7시에 일어나 아이들을 먹이고, 입히고, 학교에 보내고, 4시쯤 데려오고. 근근이 일상을 지탱하는 와중에 아이들은 엄마가 아프다는 걸 이해해주었다. 철없는 아이들로 키우고 싶었는데 내게 구멍이 많아 아이들이 속이 깊어지는 것만 같아서 자책하게 되었다. 자책한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지만. 나는 매번 나를 탓하게 된다. 그래 다음은 뭘 해야하지? 기력이 없으니 아무것도 못하겠다. 이렇게 몇일을 앓아 누웠다. 그 아픈 와중에 베를린에 다녀왔다. 몇달 전부터 티켓을 끊어 놓은 베를린 필하모닉과 임윤찬의 협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남편은 아픈 배우자를 데리고, 아이들을 데리고 베를린까지 기여코 왔다. 숙소에서 달리 할일 없이 보냈지만, 아이들은 이 여유로운 여행에 꽤 만족하는 듯 했다. 나도 슈퍼노잼도시 베를린이라면 관광을 하지 않아도 여한은 없었다. 이 와중에 베를린 필하모닉의 공연을 본다. 헛웃음이 나왔다. 이 동화같은 일에 큰 감탄할 에너지도 없는 몸을 이끌고, 4시간을 달려왔다. 그리고 임윤찬의 연주를 듣는다. 공연장 입구에서 아이들과 작별의 키스를 하고 프라하의 루돌피넘과 다른 현대적인 베를린 필하모닉 공연장에 내 자리를 찾아 앉았다. 내 자리 옆에는 롱드레스를 입은 우아한 어머님이 앉아 계셨다. 베를린에서 5시간 거리의 도시에서 왔다던 옆자리의 우아한 어머님은 아이들을 호텔에 두고 공연을 보러 왔다는 나를 두고 잘했다며 칭찬을 해주셨다.

 

 

“그래 엄마가 그렇게 해야지, 그래야 아이들도 그게 당연한 줄 알고 크더라구요”

 

저 별로 욕심없는 엄마라 그래요. 그 시간에 나나 행복하자 염불처럼 외워요. 제가 동동거린다고 아이들이 잘크는 것도 아닌 것 같고, 엄마가 행복하면 아이들도 행복해 하는 것 같고…변명같은 말들을 마음 속에서 웅얼거렸다. 겉으론 멋쩍게 웃고 말았지만, 사실이다. 아이들은 내가 없어도 잘자랐다. 방임의 구멍 속에 아이들의 가슴은 시릴지 몰라도, 어쩐지 덜그덕 덜그덕 잘 굴러가긴 했다. 진통제를 먹고 박물관에 가서 좀비처럼 걸어다니고, 공연장까지 남편과 아이들에 배웅해주고, 아이들은 내가 얼른 회복하기를 기도했다. 나는 모두가 잠든 밤에 내내 엄마가 보고싶었다. 어디 산기슭에 파는 잔치국수에 부추전을 먹으면 나을 것 같고, 엄마가 이마를 쓸어주면, 그러면 싹 나을 것만 같았다. 몇일을 식은땀을 흘리며 뒤척이다. 몸이 어느정도 회복되었을 때에는 속이 울렁였다. 진통제 때문에 위염이 생긴듯 했다. 아이들은 학교를 갔고, 집은 엉망이고, 남편은 다음 금요일에 되어야 돌아오는데, 나는 여기서 무덤에 누워있는게 아니라면 뭘까. 눈물이 또르르 흐르는데, 내가 누구에도 해외에서 도움청하지 못하고 끙끙 앓는 것을 아는 멕시코 친구가 해준 말이 생각났다.

 

 

 

“너는 너의 어머니가 되어야 해”

 

이상하게 이 말은 오래오래 내 마음에 남았다. 적어도 여기에선 나는 나의 어머니가 되어야 했다. 엄마를 그리워하지 말고, 내가 나의 어머니가 되어야 해. 무덤을 박차고 나가 카페에 한참을 앉아 있다가 왔다. 내 삶을 살려면 건강해야 한다. 잘자고, 잘먹기. 잘먹고, 잘살기. 프라하에서 생활하면서 타인의 도움도 받았지만 내가 먼저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던 순간이 더 많았다. 그게 나를 돕는 것과 같았으니까. 남편 없이 내가 아이둘을 건사하며 하루하루 살아간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꼈었다. 단 한번도 내 두 발로 선 적없었던 것같은데, 아이들을 먹이고 재우고 공부시키며 내가 이 모든 짐을 짊어지게 되었고, 마치 어른인 것처럼. 살게 됨에 나름 자랑스러운 마음이 있었다. 여기 체코 엄마들도, 국제학교의 외국인 엄마들도 대체할 사람없이 엄마의 노동을 묵묵히 해나간다. 너무 힘들 땐, 친정엄마의 손을 빌려가며, 자본의 힘을 빌려가며 말이다. 도무지 이길 수 없는 날엔 그냥 져버리는 것도 어른의 삶이다. 뒤늦게 지독하게 아팠고 힘들었다 나의 영어선생님 르네에게 이야기 하니, 르네는 속상해 했다. 너는 너무 독립적이야. 나도 있고, 누구든 너를 도와줄 준비가 되어있는데, 왜 매번 혼자 감내하는 거니.. 너는 그래도 된다고 말해주었다. 고마운 마음이었다. 그래 다음에, 이런 일이 있으면 네 도움을 청할게. 엄마의 몫은 많지 않을지도 모른다. 더는 내려놓을 것도 없는 것들을 내려놓는다. 더 잘하지 않아도 되니까, 더 애쓰지 않아도 되니까, 너는 너 그대로 그대로 행복하게 잘살아 주면 돼. 마음에 사랑을 담아 씨앗을 심었다. 나의 아이들은 지극히 순하고 예쁘나, 나의 그릇이 종지만하여 아이들을 담지도, 나를 담지도 못한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니 곁눈질 하지 말아야지. 아이들에게도, 나에게도 너그러워야지. 

 

나를 위한 식사를 차렸다. 오로지 나를 위한 요리를 하고 나의 건강과 안녕을 빌며 맑은 해물탕을 끓였다. 낮은 컨디션으로 무덤에 누워있는 나를 위해. 무덤을 박차고 나가 다시 세상을 탐험할 힘을 얻기를 바라서 말이다. 내가 아이들에게 해주는 사랑을 담아서. 해물탕을 끓여 입먹고 나니 것같았다. 그래 나는 내게도 엄마가 필요해서 기운차리지 못했는지 모른다. 엉망진창인 프라하의 봄날. 비가왔다 흐렸다. 더웠다. 추웠다를 반복하고 어제는 돌발성 우박과 비가 내렸다가 다시 해가 반짝 뜨기를 반복했다. 변덕스러운 날씨! 해가 반짝 하고 뜨면 기운차리기 쉬우련만, 그래도 무덤은 박차고 나가야지. 잘먹고 잘살아야지

에스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