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 못드는 날들이 많았다. 커피를 끊기로 결심한 것은 의외로 단순한 이유였다. 새벽에 깨고, 쉽게 잠들지 못하는 데다 수면의 질이 낮아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더욱 피로해 커피에 의존하고 하루에 한 잔 먹던 것이 두잔이 되고, 세 잔이 되는 날도 있었다. 그런 날엔 심장이 빨리 뛰어서 누워있는 동안에도 심장이 펄떡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이렇게 살 순 없어 마음먹어 본김에 딱 30일만, 커피를 끊어보자 생각했다. 결심과 다르게 언제나 변수는 있고, 몇 주 뒤 이탈리아 남부여행이 계획되어 있었다. 커피없는 여행, 게다가 커피없는 이탈리아 여행이라니, 상상만해도 피곤하고 미련한 여행이 될 것이었다. 그래도 이 갈망을 참아보리라. 일단 잠을 잘자야 행복하고 건강하고 여행도 즐겁게 다닐거 아닌가 싶었다. 한번도 상상해본 적 없는 삶을 실현해보는 것. 그것 중에 하나가 한달간 커피 끊기였다. 그게 이탈리아 여행에서 실현하고자 한 것 아닌데, 어쨌든.
이탈리아 여행을 앞두고, 아이들과 영화 ‘루카’를 다시 보았다. ‘루카’의 배경지인 ‘친퀜테레’로 가는 건 아니지만, 나폴리로 간다. 영화 루카를 연상시키는 아름다운 지중해 연안이다. 그곳의 아이들이 행복해 보이는 건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더불어 힘차게 나아가는 생명력을 가진 바다와 함께이기 때문인 것처럼 보였다. 오로지 풍경 사진만으로 가보고 싶었던 곳이다. 나폴리에 도착해보니 날 것의 냄새가 풍기는 남성적인 도시였다. 아이들은 오랜만에 바다냄새를 맡고,습기 가득한 후덥한 바람을 맞았다. 바다도시에 살았던 것을 기억해낸 처럼 아이들은이 찐뜩한 공기를 알아차렸고, 우리가 나폴리에 도착했다는 것을 느꼈다. 우리는 바닷가 도시에 살았다. 슬프거나 기쁘거나 우리는 바다를 가서 하염없이 석양을 바라보다 오곤 했다. 그렇게 책갈피처럼 삶에 바다를 끼워넣고 나면 숨통이 트이는 듯한 느낌이 났다. 그래서 사방이 육지인 나라에 살다보니 휴가철마다 그렇게 바다를 보고 싶었던 것 같다.
나폴리는 이민자들의 도시었다. 백인이 주류 사회를 이루는 체코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흑인들이 거리에 나와 노숙을 하고 또 길거리 좌판을 열고있었다. 거리에는 빨래들이 깃발처럼 널려있고, 차량과 오토바이가 뒤엉켜 거칠게 지나갔다. 그러나 보행자를 위해 브레이크를 밟아주었다. 물론 급브레이크였다. 아이들과 길을 건널 때마다 긴장을 했지만, 나폴리 사람들은 일가족이 도로를 횡단을 하는 것을 보고 비교적 부드럽게 정차를 해주었다. 보행자와 차량과 오토바이가 질주하는 거리는 거칠고 강렬했다. 그와 대비되는 아름다운 자연 경관은 이루 말 할 수 없는 오묘한 인상을 주었다. 동경하던 풍경을 향해 떠난 여행이었다. 꼭 나폴리를 가야 했던건 아니었지만, 사진으로만 보던 그 풍경을 확인하고 싶었다. 아이 둘과 저질체력 부부가 대체 어디를 갈생각을 했던 건지, 남편에게 바닷가 소도시를 꼭 가야한다며 우겼다. 그러니까 내게는 종착지가 있었다. ‘아말피’였다. ’아말피’를 가기 위해 나폴리 여행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이들과 그 험지까지 어떻게 갈까 고민을 하다 합리적인 남편은 종일 투어를 신청했다. 이탈리아의 좁고 복잡한 도로를 아이들을 데리고 운전을 하기엔 리스크가 따르고, 내가 원하는 그 ‘아말피’까지 도달하려면 그 방법 밖에 없어보였다.
여행의 변주는 처음이었다. 우리는 늘 순례자처럼 여행을 해왔고, 차를 끌고 긴긴 시간 운전을 해서 갔다. 그런데 투어를 해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모르면 모르는대로, 알면 아는대로 그저 여행지의 감상을 감각적으로 느꼈고, 아이들이 내도록 관광지의 놀이터에서 놀더라도 그 자체가 여행이라 생각했지만, 이번에는 후회없이 발자국을 찍고 오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있었다. 무계획의 여행은 짧은 후회를 남긴다. 못가본 아쉬움은 마음에 남았다. 크로아티아 일주를 하면서, 스플리트까지 가고선 두브로니크를 가보지 않은 아쉬움이 마음에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후회스러운 것보단 그냥 아쉬움. 그래서 이번엔 완성형 여행을 해보겠다는 의자로 아이들에게 여행일정을 알려주니 아이들이 불평을 쏟아냈다.
엄마 그르면 나 다리 뿌쎠져(?)
뿌쎠져도(?) 어쩔 수 없어!”
둘째의 응석을 받으며 거기까지 갈 생각을 하니 머리가 어질했다. 어쨌든 엄마의 버킷리스트를 위해서 희생을 좀 해주기를 내심 바랐고, 그렇게 만들고 싶었다. 사실 이 생각이 모든 비극의 시작이었지만, 인생은 역동과 변주없이는 인생이 너무나 단조롭고 평화로우니, 우리에겐 도전이 필요하다. 아이들은 많이 컸고, 이제 배낭여행스러운 유럽여행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가능성을 품었다. 체코에 살면서 연휴마다 여행을 거듭하며, 우리는 매번 선택과 집중을 했다. 돈을 펑펑 쓸 수 있다면 좋겠지만, 우리의 자원은 소중하고 늘 한정되어있다. 그래서 제 1원칙 식사에는 미련가지지 않는다. 우아한 식사를 포기하고 나폴리 골목마다 파는 마르게리타 피자를 사서 서서 먹었다.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피자가 마르게리따 피자라서 오히려 좋았다. 찐득하고 진한 토마토 소스의 맛과 두텁고 쫄깃한 피자 도우, 부라타 치즈를 올려 부드러운 맛이 났다. 정말이지 언제든 아무데서나 먹어도 엄지를 치켜들게 만드는 맛이었다. 여태 먹은 마르게리타 피자는 가짜야! 그리고 이탈리아 사람들의 유난스러운 음식 자부심을 알것만 같았다. 나도 김밥을 스시라고 부르면 못참으니까. 한국 음식을 모욕하는 듯한 한국 음식점을 보고 분노하니까 말이다. 게다가 커피없는 이탈리아 여행이라니,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미안하지만, 그래도 거기엔 대체제가 있었다.
레몬 소르베.
1개에 10유로, 18,000원이다. 이제 이런 환율계산이 자동으로 돌아간다. 아마 커피를 먹고자 했다면, 레몬 소르베를 아이들에게 양보했어야 했을거다. 눈을 찡그리게 되는 신맛, 시원하고 부드러운 레몬맛이 머리 끝까지 올라왔다. 투어 차량을 타고 구경하는 차창밖엔 레몬나무들이 있었다. 해충을 막기위해선지 나무는 모기장하우스 같은 곳에서 자라고 있었고, 그 안엔 노랗고 탐스러운 레몬들이 주렁주렁 달려있었다. 샛파란 하늘과, 에메랄드색 바다, 그리고 해안가 절벽아래 따개비처럼 있는 알록달록한 주택들, 레몬의 싱그러운 색감. 지중해를 떠올리면 뭉게뭉게 떠오르던 색감이 모두 여기에 있었다. 축복의 땅이 아닌가 싶었다. 따사로운 햇살 아래 탐스럽게 영글어가는 레몬들, 밝고 행복한 표정의 사람들. 포지타노에 도착해서 알록달록한 색으로 칠해진 상점과 도자기를 구경하며 보냈다. 짧은 시간 동안 머무를 수 밖에 없었지만, 거기서 본 아름다운 돌길과 해변은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그러나 이 낭만적인 풍경 아래서 안타깝게도 나는 구역감에 온 장기가 튀틀렸고, 구불구불한 길을 승합차를 타고 나의 달팽이관의 기능을 시험하는 길에서 그렇게 멀미를 했다. 차에서 내려선 레몬에이드, 레몬소르베 뭐든 상큼한 것들을 찾아다녔고 덕분에 아이들은 더운 이탈리아 날씨에 레몬 아이스크림을 실컷 먹었다.
하루 2만보씩 걷는 여행. 둘째는 5천보는 남편에게 안겨 걸었고, 남편의 관절은 너덜너덜 했다. 어느 때는 울면서 걷기도 했고, 어느 때는 엉덩이를 흔들면서 폴짝이기도 했다. 그리고 여행의 끝에 ‘아말피’에 다 달았을 때, 내가 생각한 마법같은 풍경은 아니었다. 사진 속으로 보였던 평화로운 바다도시가 아니라 작고 복잡한 관광지였다. 사진 몇장을 찍고, 소원하던 그곳에 와봤다. 별거 없더라는 감상을 마무리했다. 인생이 그렇고 영화도 그렇지. 파랑새를 찾으러 갔던 여행에서 소득없이 과정 속에 기쁨만을 얻고 돌아간다는 그렇고 그런 이야기가 나의 로망실현 버킷리스트 여행에서 재생산 되었다. 이후에 배를 타고 카프리섬에도 가는 패기를 보였지만, 배멀미로 험한 꼴을 아이들에게 보였다. 소문대로 아름다웠지만, 사람들에 치여 돌계단에 앉아서 그놈의 레몬소르베를 삼킬때가 가장 행복했다. 엄마의 험한 꼴이 퍽이나 충격이었는지, 돌아올 때는 귀에 비닐봉지를 둘째가 직접 걸어주었다. 아이들과 나폴리 지하도시 탐험도 다녀왔으며, 지겹도록 걸어서 미쉐린 가이드에도 나왔다는 넘버원 나폴리 피자 맛집까지도 같지만 문을 닫았다. 그래 우리 여행이 그렇지 뭐. 그와중에 이탈리아 사람들은 항상 웃고 있었다. 지중해의 찬란한 햇빛을 보며 자라면, 레몬처럼 싱그러운 어른으로 자라나 보다. 길을 걷는 내내 긴장하던 우리에게 상인들은 윙크를 하고 웃어주고, 또 말 걸어 주었다. 농담을 하기도 하고 아이들에게 어디서 왔다며 말을 걸기도 했다. 이탈리아 사람의 유머러스함은 구김살 없는 어른처럼 보였다. 유머, 얼마나 성숙한 방어기제인지 모른다. 어쩔 땐 아이 둘을 건사하느라 지나치게 긴장하고 예민한 시간을 보내는데, 모든 인생의 영역에서 필요한 것은 ‘유머’ 인 것같다. 인생을 찬란하게 만드는 것은 그 인생의 주인인 우리니까.
이번 이탈리아 여행 어땠어?
찍먹(찍어먹기)를 반복한 덕분에 뭘 봤는지 기억도 안나고 커피 먹고 싶었고, 거제도, 남해, 통영 같았어..왜 통영이 한국의 나폴리인줄 알겠다..
통영 여행가면 내가 꼭 나폴리 여행를 다시 해줄게
남편과 농담같이 허무한 여행의 소감을 나눴다. 작은 기념품 샵에서 첫째는 나폴리의 유명한 축구선수 마라도나 유니폼을 샀고, 둘째는 바다소리가 나는 반찍이는 바다소라를 샀다. 이러나 저러나 아이들과의 여행은 고행이다. 소득없이 집으로 돌아가는 날들은 더 많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순례길 같은 여행을 관둘 수 없는 것은 우리 일상의 작은 쉼표이고, 그리던 곳을 가보고나서, 실망하든 만족하든, 해봤다는 시원함일지도 모른다. 커피를 끊고 레몬에 중독된 나는 1일 1 레몬에이드를 들이키며 ‘변주’에 대해서 생각했다. 무언가를 시도함에 있어서 결국 알아가는 건 ‘우리’였다는 것. 30일 간의 커피 끊기 챌린지를 통해서 커피없이 살 수 없다는 결론을 냈다. 커피가 가지는 ‘의미’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커피 끊기를 통해 꿀잠을 경험했고, 레몬 소르베에 눈을 떴다. 나폴리 여행을 통해서 ‘투어’’로 원없이 스팟찍기를 시도하며 완성형 여행을 시도했지만, 여행’이란 부족하고 아쉬워도 우리 힘으로 닿는게 까지 가보고, 멈추고 싶으면 멈추는 ‘미완성형’ 여행이 우리에게 맞다는 결론을 냈다. 그리고 꿈꾸던 여행지가 생각보다 멋지지 않을 수도 있고, 중간 정차 장소였던 ‘포지타노’가 더 아름다운 곳이라는 것도 말이다. 어쩐지 빈손으로 돌아가는 것만은 아닌 것같다. 그러니 이번 여행은 망했다곤 말하고 싶지 않다. 좀 더 맞는 방식을 찾았다고 말하고 싶다. 수많은 시도 끝에 미완성이었던 모든 퍼즐이 어떤 모양을 그려내고 있진 않을까? 작은 기대감과 함께 여행을 마무리했다.
그래도 거제도, 남해, 통영, 나폴리 레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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