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마라톤이다."
어디선가 들어봤음직한 이 말은 많은 의미를 내포한다. 인생은 생각보다 길어질 수 있으니 완급 조절을 하라든지, 매사에 꾸준하고 성실히 임하라든지, 인생에는 당연히 부침이 있겠으나 최후에 결승선을 가장 먼저 통과하는 사람이 진짜 승자라든지 하는 교훈 말이다. 하지만 인명은 재천이라 자신이 죽을 날을 아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으며, 인생의 결승선이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내가 이렇게 꼬인 생각을 하는 이유는 사실 다른 데에 있다.
이미 작년 말부터 슬슬 시동을 걸어, 4월이 되어서는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했다. 복직을 했다는 표현은 나와 같은 N잡러에게는 어울리지 않으니 매일 일을 하러 나간다는 말이 적합할 거다. 개중에는 미리 교육안을 준비해야 하는 일도 있어 퇴근 후, 주말에도 마음 놓고 쉴 수가 없다. 물론 이동하는 틈틈이 게임도 하고 어쩌다 영화도 한 편 보기는 합니다만, 마치 갓 입학하여 자기 몸만 한 가방을 메고 학교에 처음 발을 들여놓는 어린이처럼 설레고도 두려운 하루하루를 보낸다.
어느새 16개월이 된 아기는 3월부터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했다. 첫 주에는 1시간씩 엄마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공간에 적응하고, 둘째 주에는 엄마와 떨어져 1시간을 어린이집에서 보냈다. 셋째 주에는 오전 일과를 소화하고 돌아왔고, 넷째 주에는 점심을 먹고 귀가했는데 마지막 주부터는 낮잠까지 자고 오는 일정으로 적응을 마쳤다. 4월부터는 오전 9시쯤 등원하여 오후 6시에 하원한다. 일하는 엄마, 아빠를 둔 1세 아기는 현재 '나인 투 식스' 어린이집 생활 중이며, 일주일에 엄마와 온전히 보내는 시간은 길게 보아야 1.5일 정도다.
"내가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일주일 내내 아기와 붙어있다가, 주말조차 일을 한다는 이유로 방문을 닫고 홀로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생활이 시작되자 금세 번민에 빠졌다. 조금이라도 벌 수 있을 때 더 벌어두자는 나, 미래를 고민하며 뭐라도 더 성취하려는 나, 아기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늘리고 싶은 나, 그저 푹 자고 종일 책을 읽거나 영화나 봤으면 하는 나. 수많은 내가 밀물처럼 밀려왔다 썰물처럼 밀려간다.
대체 내가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100m 달리기를 하듯 인생을 사는지 모르겠다. 겨우 몸을 일으켜 시작한 하루를 숨 가쁘게 뛰다가 내일 달릴 코스를 미리 짚으며 잠에 든다. 인생은 마라톤이라는데 내 발 밑에는 경력이 단절될 수 있다는, 자칫 내가 알고 속해있던 사회에서 잊힐 수 있다는 불안이 뜨거운 불판처럼 달궈져 있다. 그리하여 나의 매일은 절벽을 따라 아슬아슬 달리는 단거리 경주다. 이대로 괜찮은 걸까?
시간을 달리는 워킹부모
이번 달만, 이번 학기만 무사히 버텨보자고 스스로를 달랜다. 기왕 나를 믿고 건네준 일을 엉망진창으로 만들 수는 없으니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 해내자고 다짐한다. (그래서 오전 1시 28분인 지금까지 이 글을 쓰고 있기도 하다.) 물론 독박육아에 가까운 일상을 군말 없이 도맡아준 반려인과 최후의 보루인 가족들이 있으니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니까 나는 여러모로 운이 좋은 워킹맘이다.
대체 다들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궁금하다. 일하는 엄마와 아빠들이여, 어디에 기대어 살고 있나요? 어떻게 건강한 삶을 유지하나요?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건 뭘까요? 인생을 마라톤처럼 달리고 싶은 워킹부모의 이야기를 조금 더 모아보고 싶어졌다. 시간이 부족할수록 오히려 하고 싶은 일의 수는 늘어난다.
넋두리를 하다 보니 문득 몇 년 전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나는 꽤 오랫동안 노력과 마음을 쏟아부은 일에 지치고, 그에게 배신이라도 당한 듯 지친 몸짓과 회의감이 가득한 표정으로 시간에 끌려다녔다. 그러나 최근 나는 2박 3일 배탈을 앓을 때쯤 회복한 후에 먹고 싶은 음식의 목록을 적는 것처럼, 하고 싶은 일을 하나둘 적어둔다. 내가 쓸 수 있는 시간이 한정적이고 나의 미래는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기에 일어난 변화인 듯하다.
'그래. 아가야, 네 덕분에 나는 한참 동안 계속되던 무료함에서 비로소 벗어날 수 있었구나. 엄마가 된 덕분에 나 혼자서는 내 인생을 지탱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제야 인정하게 되었어. 우리의 삶을 지속할 수 있도록 현명해질게. 지금 막 시작한 너의 마라톤이 버거울 때쯤 시원한 물 한 잔을 건넬 수 있도록 잘 지내볼게.'

(처음으로 집 밖에서 다리에 힘을 주고 몇 걸음 떼어본 날)

한도리
N잡러
세 명이 한 가족, 섬에 살아요. "좋은 일 하시네요!"라는 말을 자주 듣는 업종에 종사하고 있어요. 주위를 둘러보며 걷기를 가장 좋아해요. 때로는 영화를, 소설을, 친구의 이야기를 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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