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 오픈런이라니." 자고로 미술관은 시간의 굴레에서 벗어나 유유자적 떠다녀야 제맛이거늘. 설렘의 핏기를 뺀 심드렁한 목소리가 삐져나왔다. 모처럼 볕이 좋은 토요일, 오전 10시의 청량함을 머금은 공기가 제법 차가웠다. 숙박비를 아끼려 전날 심야버스를 택한 리스크는 컸다. 옆자리는 거구의 탑승객으로 당첨. 혈액순환이 되지 않아 피가 마르고 불안의 심박수는 고조되어 갔다. 꼬박 10시간 동안 간헐적으로 잠을 수혈했다. 프랑크푸르트 터미널의 비둘기 떼처럼 꾸벅꾸벅. 버스 예매 앱에서 추가로 옆좌석을 싸게 사라는 광고에 낚이지 않은 죄였다. 왜 매번 비싼 값을 치르고서야 배우는 걸까.
추가 수화물 비용만 백만 원을 낸 프랑크푸르트로 행 비행기에서 뜬 눈으로 엑셀을 돌렸다. 무려 천만 원을 들여 프랑크푸르트도서전 부스를 샀건만 정작 나는 외주에 짓눌려 휘청이는 중이었다. 가족보다 많은 시간을 보내고 의지했던 동료가 모든 걸 쑥대밭으로 만들고 잠적한 사이 모든 책임은 나를 겨누었다. 살 궁리만 하기도 벅차 모든 감정의 버튼을 꺼버렸다. 무거운 책 박스를 나르면서 악화된 무릎의 퇴화는 크레셴도를 그리고 있었다. 높은 층고와 상반된 낮은 조도의 미술관 계단을 내려가는데 무릎이 겉돌았다.
<주말의 명화> 속으로 들어온 것 같은, 세기의
작품들이 에워싼 슈타델에서 제일 반가운 건 소파였다. 관람객 의자에 앉아 시야가 허락하는 만큼 작품을
꾹꾹 눈에 담았다. 저녁 비행기까지 넘치는 시간을 보낼 유일한 곳이었다. 주말 관객의 파도를 피해 정처 없이 방과 방 사이를 떠다녔다. 그렇게
당도한 B1의 사진전. '아장아장' 의태어 딱 그대로인 작은 아기가 미술관 바닥을 기어다니고 있었다. 작품에
푹 빠진 엄마의 부츠를 잡고 칭얼거리는 모습을 보며 모골이 송연해졌다.
한국이었다면
순식간에 ‘맘충’이니 뭐니 비방으로 도배되었을 자극적인 헤드라인이
뇌리를 스쳤다. 아연실색해 나는 몰래 아기를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작품에
몰입한 엄마와 간간이 그 작은 주먹을 쪽쪽이처럼 빨아먹으며 사지 보행 탐험 중인 아기. 유럽의 허브인
프랑크푸르트에서 – 모든 인종이 저마다의 바이러스를 실어 날랐을 이 관광 명소의 바닥을 - 그 광경은 망막에 그대로 각인되었다. 그보다 충격적인 건 아무도
그들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사실.
한국에 돌아와서도 잔상이 오래 가시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건 방관이 아닌 존중이었다. 아이도 엄마도 각자의 방식으로 작품을 즐길 권리가 있다는 것. 응당 엄마는 어떠해야 한다는 편협한 사고에 갇혀 고통받는 줄도 모르던 개구리가 우물 밖으로 튕겨 나간 순간이었다. 숨 가쁘게 돌아가는 일상에서 나는 늘 부족한 엄마였다. 새벽까지 게임에 빠진 아이를 혼내면서, 입 짧은 아이의 식성을 타박하면서 스스로를 자학의 끝으로 몰아세웠다. 전설처럼 내려오는 <엄마의 정석>이라는 허상을 깨뜨린 후 육아서에 나오는 엄마와는 동떨어진 삶을 나는 인정했다.
"엄마 오늘도 진짜 힘들었어. 너무 힘든데 다 포기할까?" 어른답지 못한 속내를 투명하게 드러내면 아이는 옹달샘 동요를 각색해 "실수해도 괜찮아. 다시 한번 해보자!" 화음으로 화답한다. 아이의 등을 긁으며 우리의 제멋대로 우주를 창조한다. 하늘에서 엄마를 골라 땅에 내려왔다는 내 아기의 상상 속엔 비잔틴풍의 예수님과 사극풍의 토끼 사또가 같은 부서에 근무한다. 시대와 종교를 대통합한 상상력에 끅끅끅 웃음을 참다 우리는 밤이 떠나가라 깔깔깔 웃는다. 마치 모자란 너를 지켜주러 왔다는 듯 온통 잿빛인 일상을 총천연색으로 물들이는 이 토끼 같은 녀석을 통해 나는 매일 신의 현현을 목도한다.


youme
너와 나, 합해서 우리.
사랑이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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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시게 빛나는 연휴를 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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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여사의 딸로 태어났지만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할 일이 없겠네." 티베트의 격언이자 어느 일본인 심리상담가의 책 제목이고, 사직동에서 오랜 시간 짜이를 팔고 있는 그 가게 앞 입간판에 적힌 글귀이기도 하다. 어느 영화의 "루이즈가 그러는데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선 그저 마음 편히 먹고 흘러가게 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