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의 기쁨과 슬픔

2026. 06. 09by오자히르

아침이면 그리스, 이집트, 프랑스인과 함께 요가를 한다. 오후에는 미국, 브라질, 러시아인 엄마들과 아이들 플레이 데이트를 한다. 아이는 학교에서 이탈리아와 스위스, 이스라엘과 중국, 미국과 브라질 혼혈인 친구들과 함께 수업을 듣는다. 어디를 가도 한국인은 우리 가족뿐이다.  

 

낯선 나라에서 산다는 것은 때로 외롭지만 나를 알아가는 좋은 기회가 되기도 한다. 언제부턴가 아무도 날 모르는 곳으로 떠나고 싶었다. 완전히 다른 환경과 언어, 사람들 속에서 그저 ‘나’ 자신으로 살아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 꿈을 접어둔 채 회사원, 엄마, 대학원생, 프리랜서로 지난 20년을 바쁘게 살았다. 

 

마흔을 앞두고 삶은 나를 그리스로 데려다 주었다. 오래된 꿈을 이루어주려는 듯이. 이곳에서의 시간은 한국과 다른 리듬으로 흐른다. 열쇠를 챙기고, 숲을 산책하고, 시장에서 과일을 고르는 일도 이제는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었다. 호기심 많은 나에게 이방인으로서 적응하는 과정은 생각보다 즐거웠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보는 경험은 나에게 큰 해방감을 주었다. 순수한 그리스인에게서 받은 따뜻한 환대는 나를 편안하게 했다. 나를 설명하거나 증명할 필요가 없는 이곳에 와서야 진정한 나를 마주할 수 있었다. 나는 존재 자체로 충분하고, 삶은 있는 그대로 아름답다는 사실을 그리스의 따스한 햇살과 시원한 바람이 조용히 일깨워 주었다. 

 

현지인은 이방인에게 기대를 하지 않는다.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뿐이다. 옳고 그름을 따지지도 않는다. 과거의 말과 행동으로 나를 함부로 판단하지 않고, 현재의 나를 오롯이 바라봐준다. 시간이 지나고 깨달았다. 그건 나를 존중한다는 뜻이었다. 내가 나로 존재하듯, 너도 너로 존재하면 된다는 따스한 허락이었다. 덕분에 나는 온전히 나로 살아가는 기쁨을 소소히 만끽했다. 

 

그러나 아무리 익숙해져도 현지인이 되는 건 아니다. 문득 한국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봄이면 벚꽃이, 가을이면 단풍이 늘어선 거리가 생각난다. 가족과 나누던 식사, 별다른 약속 없이 만나던 친구들, 새벽 배송의 편리함도 그립다. 이곳에서는 일과 육아, 집안일을 남의 도움 없이 모두 스스로 해결해야 해서 버겁게 느껴질 때도 있다. 모국어로 편하게 대화할 수 있는 사람도 가끔은 보고 싶다. 

 

한국 음식으로만 채워지는 빈 자리도 있다. 지중해 음식도 훌륭하지만, 마음을 가장 깊이 위로하는 음식은 여전히 한식이다. 한국 식재료를 구하기 어려워 본토 맛은 못내더라도 한식을 먹고 나면 마음의 공허함이 신기하게 채워진다. 한국은 단순히 태어난 나라가 아니라, 나의 정체성을 만들어 주고 소중한 추억이 모두 켜켜이 저장된 공간이었다. 

 

다행히 나는 함께하는 시간만큼 혼자 있는 시간과 여유를 좋아한다. 그래서 심심함이나 외로움을 자주 느끼지 않는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아간다. 사람을 만나면 언제나 배울 점을 찾듯이, 다른 나라에 있어도 좋은 점만 내 삶으로 가져온다. 장점에 집중하면 단점은 자연스레 사라진다. 한국에서는 빠름과 편리함을, 그리스에서는 여유와 느긋함을 마음껏 누리면 된다. 

 

같은 이방인과 고충을 나누는 것도 때로는 도움이 된다. 아이 친구 엄마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모두 국적이 달라서 서로의 다름을 자연스레 존중하게 된다. 학교 커뮤니티의 다양성에 기여한다는 자부심이 있으면서도, 자기만의 색깔을 잃지 않는다. 특히 K-뷰티에 대한 엄마들의 관심 덕분에 한국에서 가져온 마스크팩을 선물하며 자연스럽게 가까워지기도 했다. 이방인이라서 나는 오히려 특별한 존재가 된다.  

 

한국에서 멀리 떠나 있으니 오히려 한국의 아름다움이 더 선명하게 보인다. 한국이 얼마나 대단한 나라인지, 내가 얼마나 한국을 사랑하는지 더 깊이 느낀다. 동시에 그리스에서는 삶을 천천히 즐기는 법을 배운다. 효율과 속도를 내려놓은 대신, 광고의 유혹에서 벗어나 택배 없는 삶이 얼마나 가볍고 자유로운지, 삶은 소유하는 게 아니라 경험하는 것이란 사실도 깨달았다. 한국이 내 삶을 단단하게 지탱하는 뿌리라면, 그리스는 나에게 더 넓고 큰 세상을 보여주는 날개다.  

 

이방인으로 산다는 것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지만, 두 나라와 모두 연결되어 있는 삶이다. 두 나라를 함께 품고 살아갈 수 있다는 건 이방인만이 누릴 수 있는 축복 아닐까. 기쁨과 슬픔이라는 감정도 결국 나의 선택이다. 그래서 오늘도 주어진 하루를 감사히 살아간다. 삶이 내게 준 선물을 온 마음을 다해 누리면서. 

 

 

 

 

오 자히르

sarahbaek5@gmail.com 

www.instagram.com/sarahbaek

https://blog.naver.com/ejej6

 

 

 

 

오자히르

번역가

단순한 삶 속에서 지혜와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