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드를 보다가 산후우울증을 생각했다

2026. 05. 15by한도리

정들어 보는 미드 중 하나가 <버진 리버>다. 친구들에게 소개할 때는 "배경은 <전원일기> 같지만 내용은 <위기의 주부들>이야!"라고 설명하는 시리즈다. 프랜차이즈 진입을 막는 규칙을 통과시킬 수 있을 정도로 자급자족이 가능한 동네를 배경으로 여러 사람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가장 최근에 본 시즌에서는 젊다 못해 어리다는 느낌이 드는 부부가 출산, 육아를 처음으로 경험하는 에피소드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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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태어난 아기의 엄마에게는 온 세상이 불안이다. 아기의 울음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젖만으로도 잘 성장하고 있는지, 잠을 자다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아닐지, ... 아기가 원하는 건 뭐든 알고 줄 수 있어야 할 것만 같지만 도무지 그 무엇도 제대로 알 수 있는 게 없다. 너무나 작고 여리고 혼자서는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는 아기를 온전히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에 늘 신경이 곤두서있다.  아기에게 병균이나 바이러스를 옮기지는 않을지, 아기를 떨어뜨리지는 않을지, 어떠한 나쁜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지 걱정으로 주위를 둘러싼 모두를 경계한다. 점점 외로워진다. 나도 똑같이 겪었던 일이다.

 

마을 사람들은 출산 이후 집에 틀어박혀 아기를 돌보는 데에 온몸과 마음을 쏟는 리지를 위해 파티를 열었다. 적당한 관계 유지가 꼭 필요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출산 후 나 역시 감당하기 어려운 고립감에 시달렸다. 이대로 사회와 격리되어 다시는 복귀할 수 없을 듯한 불안감, 평소 생활하고 사람을 만나던 장소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아기와 단둘이 보내는 시간들. 감사하게도 애써 찾아오려면 1시간 반 이상은 족히 걸릴 길을 많은 친구가 와주었다. 덕분에 몇 시간은 여유를 되찾고 속에 쌓인 말도 할 수 있었다. 꾸준히 글을 쓸 기회를 가지며 마음을 달래기도 하였다.

 

파티가 열린 바에서 아기의 울음을 달래다 무너지고 만 리지는 자신에게 변화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조부모에게 잠시 아기를 맡기고 파트너 데니와 함께 산책을 나가, 함께 명상을 하려다 뜬금없이 '아기 상어' 노래를 부르고 서로 마주 보며 웃는다. 이내 마음의 여유를 찾고는 임상 간호사가 권했던 세로토닌 처방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바로 이 장면이 내게 사무치게 와닿았다. 그 큰 우울이 호르몬 때문이었다면 왜 나는 적절한 해결책을 찾아내기 어려웠던 걸까? <버진 리버>의 리지와 내가 달랐던 지점은 내게 정말 필요한 형태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는 점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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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와 다르게 출산 이후 산모의 감정 변화는 호르몬과 밀접한 연관을 가진다는 산후우울증의 개념이 우리 사회에도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어떤 실질적인 해결책이 마련되었는가? <모자보건법> 제10조의 5에는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임산부가 임신 또는 출산으로 인하여 겪는 우울, 불안 등 심리적 증상(이하 “산전ㆍ산후우울증”이라 한다)을 극복하기 위한 지원을 할 수 있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여기서 중요한 건 "할 수 있다"이다. 할 수 있다는 표현은 반드시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산후우울증 대책'으로 인터넷 검색을 하면 대부분 남편과 가족이 얼마나 공감하고 육아를 분담하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보건소에서 선별 관리, 상담 등을 제공하고 있지만 모든 산모에게 닿기 어렵다. 신생아를 혼자서 돌보다 보면 정보를 알아볼 시간이 부족할뿐더러, 직접 찾아가서 상담을 받을 엄두는 도무지 나지 않는다. 임신 중 겪은 많은 신체적 불편이 "원래 그래요."로 치부되었듯 산후우울증 역시 대부분의 산모가 겪으니 '알아서 잘 넘기라'는 거다. 정말 너무해! 크게 잘 못 되었어!

 

내 우울감은 점차 가시어 아기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일을 다시 시작할 때쯤에는 꽤 괜찮아졌다. 그러는 사이에 때때로 이혼을 생각했고 가까운 이들에게 크게 화를 냈으며, 생각보다 자주 창 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었다. 돌이켜보면 위태로운 나날이었다. 결코 아기를 해치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지만 모든 걸 멈추고 사라지고 싶었다. 가족과 친구들의 염려와 도움이 있었기에, 일을 같이 하자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나를 대신하여 아기를 돌봐주신 어린이집 선생님이 계셨기에 나는 겨우 버텼다. 그야말로 운이 좋아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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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유명한 히포크라테스가 "자궁은 모든 질병의 근원"이라 주장한 데에서부터 현대의학에 이르기까지 여성의 몸과 건강은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했다. 다른 많은 분야에서처럼 의학에서 역시 표준은 남성에게 맞춰졌고 여성의 질환은 '그저 일어난 일'이거나 심리적인 문제로 간주되었다. 최근에는 이를 바로잡으려는 노력이 조금씩 나타나고 있으나 아직 한참 부족하다. 산후우울증은 여성만이 겪는 일이기에, 더구나 정신 건강의 영역이라 여겨지기에 문제의 심각성에 비해 대책은 터무니없는 수준인 것이다.

 

어디 이 문제만 그러할까. 돌봄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경험하는데 돌봄 노동의 가치는 충분히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과거 돌봄이 가정 내에서 특히 여성에 의해 수행되는 일이었으며 현재에도 주로 여성이 돌봄 노동에 종사하고 있기에 발생하는 문제라는 설명에 일리가 있을 거다. 성 차별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보편적인 문제가 있다면 그에 상응하는 해결책을 우리 공동체가 마련해야 한다는 말이다. 함께 풀어나가야 하는 일이 이 세상에는 아직 참 많다. 거기에 힘을 보태려던 마음과 의지를 다시금 떠올려본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에서부터 시작을 해보자!

 

 

리지 & 데니, 화이팅(?)! (출처: 넷플릭스)

 

 

한도리

N잡러

세 명이 한 가족, 섬에 살아요. "좋은 일 하시네요!"라는 말을 자주 듣는 업종에 종사하고 있어요. 주위를 둘러보며 걷기를 가장 좋아해요. 때로는 영화를, 소설을, 친구의 이야기를 걸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