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리핀에 와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은 "Hello. mom."이다.
남아공에서는 "How are you? Ma'am."을 많이 들었는데, 여기서는 무조건 MOM이다.
쇼핑몰을 가든, 음식점을 가든 어떤 곳에 가도 먼저 건네 오는 인사가 '헬로 맘'이었기에 남편의 존재감에 스크래치가 나기 시작했다.
"Hello. sir 은 없어. 나는 쳐다보지도 않아. 내 말은 씹혔어."
본인은 필리핀에서는 투명 인간이라는 둥, 사람도 아니라는 둥 투덜거렸다.
남아공에서 살 때는 서류 및 대외적인 일 처리, 관공서 업무 등 경제적인 권한까지도 다 남편을 통해서 나가도록 했었다. 마트 카드 이름, 보험 외 멤버십 가입을 해야 하는 모든 서류는 다 남편 이름으로 했다. 귀찮은 것도 있어서 떠 넘기기도 했지만, 대부분 비자 관련 증빙이 필요했기에 동반 비자로 있는 나는 그게 편했다.
필리핀에 온 뒤로 정착을 위해 가구, 가전을 사러 가서도 모든 설명과 컨펌을 남편이 아닌 나에게 와서 물었다. 귀에는 MOM이라고 들리는데 왜 아무 여자만 보면 MOM이라고 부르는지 좀 의아했는데 발음의 문제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 필리핀 영어의 특징인 '단모음화' 경향 때문에 [æ] 발음이 [ɑ]나 [ɔ]에 가깝게 들리면서 'Mom'처럼 들리는 것이다. 무튼 뒤에서 늘 딴짓하고 있는 나에게 이것저것 묻고, 식사 후 계산서도 나에게 가져다준다.
은행에 앉아 있는 직원은 10명 중 9명이 여자다. 마트 캐셔는 대부분 여성이다. 여성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다. 필리핀은 여성의 사회 진출이 매우 활발하다. 고학력 전문직이나 관리직 여성의 비율도 아이사 국가들 중에서도 상당히 높은 편이다. 여성의 수가 단순히 많아서가 아니라 성취 지향적이고 책임감 또한 강한 필리핀 여성들의 기질이라고 들었다. 6개월 넘게 지켜봐 온 결과, 남성들은 물건을 포장하거나 나르는 일, 힘쓰고 땀 흘리는 일을 한다. 필리핀 남자들은 속된 말로 머리 쓰기 싫어한다는 말도 있다.
이렇게 관찰하면서 보니 남녀의 역할이 확연히 나뉜 것을 볼 수 있었다. 미국의 서구 문화가 들어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필리핀의 전통적인 성 역할의 고정관념이 아직도 남아있고, 현대 사회의 경제 활동과 연관된 부분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현대로 갈수록 전통적인 모습이 줄어드는 건 맞다. 음식점 외 다른 스토어에서는 남성 직원이 계산도 하고 다른 업무도 보지만, 은행과 마트에서 본 풍경은 실질적 경제적 안주인이 여성이라는 부분을 보여준다. 문화를 좀 더 들여자 보자면 남편이 돈을 벌어와도 그 돈은 고스란히 아내에게 전달되고, 가계 운영을 책임져야 하는 문화가 강하다. 그러니 모든 가계의 결정권자는 아내인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남편의 권위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체면과 대외적인 직함을 중시하는 남자들은 오히려 이미 모든 결정권을 아내에게 다 일임하고, 실질적으로 행사하는 아내를 뒤에서 바라보는 역할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남아공도 모계 사회 중심, 필리핀도 모계 사회 중심인데 필리핀이 여성우월주의가 많이 느껴지는 기분이랄까,
같은 모계 사회지만 남아공은 네덜란드 영국 등의 지배를 받았기에 유럽 법체계와 관습이 있다. 서구적 시스템 내부에는 남성 중심 주의가 강한데 내 경험처럼, 가정 내 모든 결정권이 남편에게 있는 경우가 많았다. 문화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공부해보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알게 되면 모를까 더 공부할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문화를 경험하면 내 나라 문화와 비교하기 마련이다. 나는 이전에 남아공에서 오랜 시간을 살아서 그런지 자꾸 그 곳과 이곳을 비교하고 있다. 비슷한 듯 다른 나라,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모습을 떠올리며 말이다.
남편은 여전히 필리핀 서비스 문화의 '희생양'이 된 자신의 존재감을 챙기느라 바쁘지만, 사실 우리는 알고 있다. 밖에서는 내가 ‘Ma'am(Mom)’이라 불리며 살림의 키를 잡지만, 집으로 돌아오면 우리는 여전히 서로의 가장 든든한 동반자라는 것을. 어쩌면 남편의 투덜거림은, 이 땅의 시스템이 나를 독립적인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하고 앞세우는 것에 대한 귀여운 질투인지도 모르겠다.
"여보, 밖에서는 나를 '마담'으로 세워주니, 집에 가면 내가 당신을 세상에서 가장 귀한 'Sir'로 모셔줄게."
라고 말하면 얼마나 좋으련만 나는 아직도 그렇게 호락하게 세워주지는 못하고 있다.
글 쓴 김에 오늘 한 번 해봐야겠다.
남아공의 서구적 질서가 시스템으로 남편의 권위를 세워주었다면, 필리핀의 모계 문화는 나라는 개인을 삶의 주체로 호명해 준다. 세상이 누구를 향해 인사하느냐는 사실 그리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시스템이 남편을 중심으로 돌아가든, 일상이 아내를 중심으로 움직이든, 결국 그 안에서 우리가 서로를 어떤 모습으로 바라보고 있느냐가 우리의 삶을 완성하는 진짜 기준일 테니까.
비록 필리핀 사회는 오늘도 나를 'Mom'이라 부르며 계산서를 내밀지만, 우리는 오늘도 서로의 역할을 다독이며 이 낯설고도 따뜻한 문화 속을 함께 걸어간다.

glowd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