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3월 20일 금요일
'기호화하지 않으면 의미를 확보할 수 없다'는 말은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말이다. 틀 지어진 규범 속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고유성을 찾는 삶을, 그리고 그것을 찾았다고 평가되는 사람들을 동경하며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하지만 그럼에도 '반복 가능한 기호의 체계 안에 욱여넣어야만 역사를 역사로서 살아갈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김민호 교수의 《데리다와 역사》라는 책으로, 처음으로, 철학자 자크 데리다의 말을 들어본다. 데리다는 왜 '고유성을 고유한 채로 내버려 둘 수 없다'고 말하는 걸까.
우리는 누구나 그 자체로, 그러니까 원인 없이 저절로 존재하지 않는다.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유전물질을 받아서 한국이라는 나라의 문화를 학습하고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다양한 책을 읽고, 이 모든 것이 나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이를 전부라 생각하면 삶은 의미를 잃게 된다. 왜냐하면 나뿐 아니라 세상 모든 것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의미를 잃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우리는 삶을 의미있게 만들기 위해 일종의 액자를 만들어야 한다.
하루는 언제나 똑같다. 해가 뜨고 해가 지고, 출근하고 퇴근한다. 이 속에서 우리는 의미를 찾기 위해 일상을 액자 속으로 집어넣어야 한다. 3월 20일은 모두에게 주어져 있지만 누군가는 생일이라는 액자 속으로 집어넣을테고, 또 누군가는 승진, 은퇴, 혹은 사고, 분실 등의 액자 속으로 집어넣는다. 그럼으로 그 액자는 반복되고 역사가 되고 삶의 의미가 될 수 있을테다.
규범은 어느새 고유한 것이 되었다. 고유함 속에서 우리는 의미를 찾을 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또다른 액자를 찾는지도 모르겠다. '남성'이라는 액자를 벗어나는 사람도, '이성애자'라는 액자를 벗어나는 사람도, 또 '퀴어'라는 액자에 자신을 넣는 사람도, +를 기꺼이 자청하는 사람도 모두가 의미 없는 세상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행동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니 우리는 고유성을 고유한 채로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

에그
가차 없는 나의 촉법소녀
2025년 12월 15일 월요일내가 참여하고 있는 독서모임에서는 매년 12월, 한 해의 마지막 모임에서 시낭독을 한다. 모두가 마음에 드는 시나 책 속의 한 구절을 준비해 각자의 호흡과 온도로 전달한다. 어떤 시를 소개할까 고민하던 중에 우연히 한 시집이 눈에 들어왔다. 황성희 시인의 …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
2025년 12월 22일 월요일세상에는 오렌지만이 과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포도도 파인애플도 과일로 인정하지 않는다. 왜 다른 사람들은 다른 과일도 있다고 말하는지, 왜 자신이 오렌지만을 과일로 믿게 되었는지는 궁금해하거나 의심하지 않는다. 그저 오렌지만이 과일이라는 말만 반복…
맛있음
2026년 1월 4일 일요일인간은 무언가를 먹어야 생존이 가능하다. 먹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누구도 생존의 목적으로만 음식을 먹지는 않는다. '맛있음' 또한 아주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맛있음'은 무엇일까?농업과 독일 역사를 연구하는 철학자 후지하라 다쓰시의 《…
멘탈 아츠
2025년 12월 24일 수요일인간의 감정 중에서 '화'에 대해서는 특별히 관심도 많고 궁금한 점도 많다. 그 이유는, 감정들 중에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감정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화를 잘 내는 방법을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예전에, 내가 다니는 명상원 원장님께 '화'에 대한…
자긍심
2025년 12월 29일 월요일'자긍심'이 도대체 뭔지 고민하게 만드는 책을 만났다. 이연숙, 남웅의 《퀴어 미술 대담》은 예술비평을 하는 두 사람의 대담을 엮어낸 책이다. 많은 말들 중에서 남웅 비평가의 한 물음이 책장을 넘기지 못하게 붙잡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프라이드를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