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초 이야기

2026. 03. 20by네비올로

지긋지긋한 겨울이 끝나고, 드디어 봄이 오는 시점에서..




우리 집 베란다에는 흙이 채워진 작은 화단이 있다. 밖에서 보면 각종 식물로 예쁜 화단을 꾸며놓은 집을 쉽게 발견할 수 있어, 자연과 어우러진 단지의 컨셉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부부는 신혼 때부터 종종 화원에 들러 먹을 수 있는 바질, 이탈리안 파슬리 같은 각종 허브나 율마, 고무나무처럼 난이도가 높지 않은 식물을 키우려고 시도했었다. 하지만 언제나 식물들은 오래가지 못했고, 어느 순간부터는 집에 더 이상 식물을 들이는 일을 그만두었다.


지금 집으로 이사와서도 남들처럼 멋있게 꾸민 화단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만 했지, 뭔가 시도할 마음은 없었다.


작년 여름이 지나고 방치했던 화단에는 강아지풀을 비롯한 잡초들이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마치 일부러 심어놓은 듯..


집 관리가 너무 안 되는 느낌도 들고, 왠지 잡초는 제거해야 할 것 같은 막연한 생각에 잡초 제거 방법을 찾아보고 예전에 사다 놓았던 호미나 모종삽도 찾는 모습을 보고 아내가 한마디 했다.


"뭘 찾는 거야?"


화단을 보여주며 잡초를 제거해야겠다고 하는 순간, 아내는 웃으며 내게 말했다.


"강아지풀 예쁘게 자랐네! 둘째가 좋아하겠다!"


그 순간, '제거해야 할 잡초'가 '딸이 좋아하는 강아지풀'로 변했다. 


화단 제거 방법을 검색하면서 끈질긴 생명력의 잡초를 어떻게 완벽하게 '처리'할지 고민하며 긴장되었던 마음은 일순간 녹아내렸다. 그리고 그제야 그 잡초가 밖에 외출할 때면 아내가 딸에게 항상 양손에 쥐여주던 강아지풀이라는 것을 인지했다.


육아를 하다 보면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생긴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모사하는 장난감을 사주면서 조용히 가지고 놀기를 바라지만, 아이들에게는 장난감보다도 세상 자체가 더 흥미로운 놀잇감이며 실험실이다. (한때 우리 둘째의 최애 장난감은 빈 와인병과 박스 한가득 모아놓은 코르크 마개였다.)


"강아지풀=잡초"라는 공식처럼, 어른이 되면서 우리는 세상이 정해놓은 틀 안에서 사고하게 된다. 하지만 아이들의 눈에는 그런 구분이 없다. 강아지풀은 그저 부드럽고 재미있는 식물일 뿐이다.

어쩌면 진짜 제거해야 할 잡초는 식물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자라난 고정관념인지도 모른다.

 

꽃이나 먹을것이나 항상 '양손'에 들려줘야 만족하는 아이

 

 

 


 

 

전략가, 잡초 | 이나가키 히데히로 - 교보문고


이 일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튜브에서 즐겨보는 언더스탠딩 채널의 북언더스탠딩에서 잡초에 관한 책 (『전략가 잡초』, 이나가키 히데히로 저)을 소개하였는데, 내용이 인상 깊어 소개한다.

영상에서 다룬 잡초의 생존 전략은 우리가 단순히 '생명력이 질기다'라고 치부했던 것 이상의 치밀함과 지혜를 담고 있었다.

(남궁민 북칼럼니스트의 영상들은 정말 추천합니다!)

 

1. 잡초는 인간 덕분에 존재한다: '천이'의 초기화

흥미롭게도 잡초는 인간과 뗄 수 없는 존재다. 자연 상태 그대로 두면 숲은 큰 나무들이 우거진 극상 단계로 나아가며 잡초는 빛을 받지 못해 사라진다. 하지만 인간이 밭을 갈거나 풀을 뽑으며 '천이(Succession)' 과정을 강제로 1단계로 되돌릴 때, 경쟁자가 사라진 그 빈틈을 타 잡초가 번성하게 된다. 즉, 우리가 잡초를 없애려 노력할수록 역설적으로 잡초가 살기 좋은 환경이 만들어지는 셈이다.

 

2. 도망자의 니치 마켓 전략

잡초는 사실 식물계의 '약자'다. 키 큰 나무나 강한 식물과의 경쟁에서 밀려난 '도망자'들이 선택한 곳이 바로 보도블록 틈이나 척박한 길가다. 아무도 살지 않는 빈틈을 노리는 이들의 전략은 현대의 스타트업이 대기업이 건드리지 않는 틈새시장을 공략하는 것과 매우 닮아 있다.

 

3. 기막힌 타이밍과 인내심

잡초 씨앗은 아무 때나 싹을 틔우지 않는다. 땅속에는 1m²당 무려 7만 5천 개의 씨앗이 숨어 기회를 엿본다. 이들은 '광 요구성' 센서를 가지고 있어, 자신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없을 때(원적색광 대신 적색광이 도달할 때)에만 "지금이다!" 하고 싹을 틔운다. 또한, 갑자기 따뜻해진 겨울 날씨에 속지 않고 진짜 봄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신중함도 갖추고 있다.

 

4. 밟히면 굳이 일어나지 않는다 (유연함)

"밟혀도 일어나는 잡초"는 문학적 표현일 뿐, 실제 잡초는 밟히면 굳이 일어나느라 에너지를 쓰지 않고 그대로 누운 채로 꽃을 피우고 씨를 맺는다. 불필요한 자존심 대신 실용적인 생존과 번식에 모든 에너지를 집중하는 것이다.

 

5. 최악의 상황을 대비한 플랜 B

제비꽃 같은 잡초는 벌이나 나비가 도와주지 않는 최악의 상황이 오면, 스스로 수분하여 씨를 맺는 '폐쇄화' 전략으로 전환한다. 환경이 좋을 때는 유전적 다양성을 위해 외부의 도움을 받지만, 생존이 위태로울 때는 자가수분이라는 플랜 B를 가동해 어떻게든 대를 잇는다.

 

 

 


P.S.

1. '감성적' 전략을 사용하는 우리집 강아지풀이 자라난 이후 또 하나의 변화가 생겼다. 베란다를 자기집처럼 드나들며 나를 괴롭히던 비둘기 들이 더 이상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마도 비둘기는 도시와 같은 삭막함을 좋아하고 초록초록한 환경을 좋아하지 않은가 보다) 

2. 최근 나심탈레브의 '안티프래질'을 읽고 있는데, '잡초'야 말로 충격을 가해도 부서지지 않고 오히려 강건해지는 '안티프래질' 요소를 지닌 존재인 듯 하다. 배울것이 많은 잡초님...

 

 

네비올로

와인을 사랑하고, 일상의 깊이에 호기심 가득한 이과 아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