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독 거친 빈티지를 통과 중인 이에게..
빈티지, 그 해의 수확
빈티지(Vintage)의 어원은 '와인(Vinum)'과 '거두어들이다(Demere)'가 합쳐진 라틴어 '빈데미아(Vindemia)'에서 유래했다. 즉, '포도를 수확한 해'를 의미한다. 우리가 흔히 오래된 가구이나 옷을 가리켜 '빈티지 제품'이라 부르는 것도 단순히 낡았다는 뜻이 아니다. 그 물건이 만들어진 특정한 시대의 공기, 유행, 그리고 만든 이의 정신이 깃들어 있어 복제가 불가능한 고유한 가치를 지닌다는 뜻이다.
술의 세계에서도 와인의 빈티지는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소주, 맥주, 위스키 같은 대부분의 술은 사용된 곡물 원료의 빈티지가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제조일자나 공산품처럼 일정한 맛을 유지하는 것이 미덕이다. 평소 마시던 맥주의 맛과 오늘의 맛이 다르다면 소비자는 실망할 것이다.
하지만 와인은 다르다. 와인은 농부의 술이다. 양조자가 아무리 뛰어난 기술을 가졌더라도, 그해 내리쬐었던 햇살의 양과 비의 양, 수확 시기의 바람을 이길 수는 없다. 그래서 와인은 같은 이름표를 달고 있어도, 2019년의 맛과 2020년의 맛이 판이하다. 와인에게 빈티지란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그 해 자연이 써 내려간 각본을 정직하게 담아낸 결과물이다.
복제될 수 없는 시간의 기록
얼마 전, 연희동으로 이사한 지인의 빈티지 샵을 찾았다. 빈 손으로 가기 아쉬워 18년 전 런던 어학연수 시절에 샀던 르네 마그리트 화집을 선물로 챙겼다.
돈 없던 학생 시절, 대도시 런던에서 무제한 교통패스 하나에 의지해 버스를 타고 무료인 박물관이며 갤러리를 전전하던 기억이 난다. 예술도 역사도 잘 모르던 때였지만, 그저 그 분위기가 좋았다. 어느 공원 팝업 가판대에서 충동적으로 집어 든 그 화집은 화창했던 날씨와 즉흥적인 기분까지 고스란히 머금고 있었다. 그 크고 근사한 책은 자취방과 신혼집 책장의 주인공으로 자리하다가, 아이가 태어난 뒤로는 보이지 않는 책더미 속에 갇히는 신세가 됐다.
“여기가 좋겠어요!”
사장님이 빈티지 선반 한켠에 책을 세워놓는 순간, 묘한 기분이 들었다. 런던의 햇살과 자취방의 공기, 신혼의 설렘이 한꺼번에 소환됐다. 드디어 제자리를 찾았구나 싶었다. 빈티지를 빈티지로 만드는 건 18년의 세월이 변화시킨 표지의 색이 아니었다. 그 물건에 깃든, 세상 그 누구도 복제할 수 없는 '유일한 기억'이었다.
포도나무의 한해에는 백업이 없다
이탈리아 바롤로 지역의 와이너리 '지디 바이라(G.D. Vajra)'에 관한 기사를 읽던 중, 마음에 와닿는 인터뷰를 찾아볼 수 있었다.
『지금은 웬만한 건 다 클라우드에 백업돼 있어 잃어버려도 복구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죠. 하지만 농업에는 백업이 없습니다. 한 해 수확이 좋지 않다면 다시 시작하는 데 365일이 필요합니다. 힘들 때마다 우리를 포도밭으로 이끄는 힘은 바로 이 '되돌릴 수 없음'에 대한 자각입니다.』
그의 말처럼 와인 한 잔은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을 견뎌낸 포도와 농부의 기록이다. 농부는 봄철 서리에 맞서 포도밭에 난로를 피우고, 여름 장마로 인한 곰팡이를 피하기 위해 잎을 일일히 정리하여 통풍을 시켜주고, 일기예보를 보며 노심초사 하며 수확시기를 결정한다. 하지만 결국 농부는 그 해의 작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올해 농사는 망쳤으니 리셋하고 다시 합시다"라고 말할 수 없다. 그저 묵묵히 그해의 최선을 병에 담을 뿐이다.
결핍이 만드는 아름다운 변주
와인숍에 가면 이름표는 같지만 유독 저렴한 가격의 병들이 있다. 일명 망빈(망한 빈티지) 이라 불리는 해의 와인들이다. 일조량이 부족했거나 비가 많이 와서 장기 숙성이 어렵고 품질이 떨어진다고 평가받는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망빈’들은 우리에게 의외의 즐거움을 준다. 20년을 기다려야 비로소 열리는 ‘그레잇 빈티지’에 비해, 망빈은 지금 당장 따서 마시기에 훨씬 부드럽고 접근성이 좋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완벽하지 않기에 어떤 상황에는 적합한 것이다.
빈티지의 존재는 세상을 더 다층적으로 만든다. 모든 해의 기후가 완벽했다면 와인은 지루한 공산품과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조건이 나쁠 때 양조자는 평소와 다른 양조 방식을 고민하며 사투를 벌인다. 어려울 때 인간은 더 큰 능력을 발휘하고, 그 결핍을 승화시키기 위한 노력은 뜻밖의 결과물을 낳는다. (어려운 빈티지 일수록 양조자의 진짜 실력이 드러난다.)
영국 밴드 라디오헤드의 명곡 'Creep'이 전설이 된 과정도 이와 비슷하다. 기타리스트 조니 그린우드는 사실 이 곡의 조용한 분위기를 싫어했다고 한다. 그는 녹음 도중 노래가 마음에 들지 않은 나머지 후렴구 직전 “콰쾅!” 하며 거칠게 기타 줄을 긁어버렸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거친 소음이 곡의 정체성이 되어 전 세계적인 히트를 기록했다. 본인이 싫어했던 환경에서 나온 비틀린 변주가 오히려 완벽한 조화를 만들어낸 것이다.
매 순간이 다시 없을 빈티지이기에
우리의 삶도 늘 ‘그레잇 빈티지’일 수는 없다. 육아를 할때 아이들은 항상 변수를 만들어 내가 상상한 방향과 전혀 엉뚱한 곳으로 이끌며, 회사에서도 공들인 일이 생각만큼 풀리지 않아 ‘망한 빈티지’처럼 느낄 때도 있다.
하지만 자연은 우리를 시험하려고 혹독한 날씨를 보내지 않는다. 비바람은 그저 불어올 뿐이고, 우리는 그 계절을 지나는 중일 뿐이다. 날씨를 바꿀 수는 없지만, 젖은 땅을 살피고 꺾인 가지를 다독이는 일은 할 수 있다. 양조자의 진짜 실력과 나무의 생명력은 바로 그 사투의 과정에서 길러진다.
무엇보다 우리가 올해만 농사를 짓고 말 게 아니라는 사실이 위안이 된다. 비를 맞으며 견딘 시간 동안 나무의 뿌리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 깊고 단단해진다. 지금의 고단함이 나라는 사람의 지속가능성을 더 깊게 뿌리내리게 하는 과정이라 믿는다.
훗날 나의 빈티지를 돌아봤을 때, 유독 거칠었던 그해의 기록이 사실은 나를 가장 나답게 빚어낸 결정적 장면이었음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어떤 날씨 속에서도 나무는 자라고, 우리에겐 아직 농사지어야 할 수많은 빈티지가 남아 있다.
와인 초심자를 위한 상식
1. 와인병에 적힌 빈티지는 와인의 제조일자가 아닌 사용된 포도가 재배된 해를 가리킨다.
2. 대부분의 와인은 가을철 포도를 수확한 이후 발효 숙성을 거쳐 짧게는 다음 해, 늦으면 10년 후에 출시하기도 한다.
3. 보리, 쌀 등 곡물은 저장성이 좋은 반면, 포도는 재배에 많은 노력이 들고 저장성이 좋지 않다. 대부분의 양조장이 포도 산지에 존재하며 수확 직후 양조를 진행해야 하는 이유다.
네비올로
와인을 사랑하고, 일상의 깊이에 호기심 가득한 이과 아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