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는 바다의 나라다. 눈부신 윤슬과 잔잔한 물결, 파란 물감을 풀어헤친 듯한 색. 서양 문명의 발상지, 올림픽, 신화로 기억되는 나라지만 지금 이 순간 생생하게 살아있는 바다 앞에서는 잠시 힘을 잃어버린다.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면 그리스에서 철학이 탄생한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만 같다.
시시각각 변하는 물빛에 파도 소리를 듣고 있으면 머리가 맑아지고 마음은 고요해진다. 해변에서 책을 읽고 수영하고, 따뜻한 햇살과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낮잠을 잔다. 아무런 목적 없는 시간. 자연이 주는 최고의 명상 치유다.
바다는 온전히 '지금 이 순간'에 머물게 한다.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도 잠재운다. 오직 내가 지금 여기 존재하고 있음을 깨닫게 해준다. 마치 태양과 바다, 나만 지구에 남아 있는 것처럼. 아이들은 현존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내일이 없는 것처럼 파도에 몸을 맡기고, 햇빛에 피부가 그을려도 상관없이 뛰어논다. 바다는 더 이상 여유를 미루지 말라고 말한다. '언젠가' 그 미래는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먼 훗날 꿈을 이루면 하고픈 일들이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바다는 삶이 계획대로 흐르지 않는다고 알려준다. 계획은 단지 생각일 뿐이고 미래는 내가 통제할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끊임없이 계획과 목표를 세우고, 불가능한 일정으로 하루를 빼곡히 채우며, 스스로를 몰아붙인다. 하지만 지금 내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건 수많은 우연이 겹쳐 만들어 낸 기적이다. 그러니 물 흐르듯 유연하게 살아도 괜찮다고, 모두 지나간다고 바다는 조용히 속삭인다. 내 뜻대로 되어야 한다는 생각만 놓아버려도 삶은 얼마나 가볍고 편안한지. 아무리 거센 파도와 폭풍이 몰아쳐도 잔잔해지는 순간은 언젠가 온다.
무엇보다 바다는 진짜 나를 마주하게 한다. 지구에 초대받은 손님처럼 눈 앞에 펼쳐진 삶을 생생하게 경험해 보라고 말한다. 남의 시선에 흔들리지 말고, 중요하지 않은 것에 시간을 빼앗기지 말고, 나 자신에게 더 관심을 기울이라고 이야기한다. 목표와 결과가 없어도 그 자체로 기쁜 일은 무엇이냐고 물어본다. 때로는 불완전한 자신을 받아들이고 있는 그대로 사랑하라고 따뜻하게 위로한다. 그래서 바다에 다녀오면 한없이 투명하고 조금 더 나다운 사람이 된다.
아침에 일어나면 창문을 열어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눈을 감고 감사한 일을 떠올린다. 하루에 30분만이라도 그저 존재하는 시간을 보내려 노력한다. 바람과 햇살을 온전히 느껴보고, 몸과 마음이 편안한지 바라본다.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건 Doing이지만, 삶을 충만하게 하는 건 언제나 Being의 순간이다.
진정한 행복은 효율과 생산성을 내려놓을 때 찾아온다. 모두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잠시 멈추는 용기,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 존재만으로도 가치 있다는 믿음 아닐까. '성취'라는 도파민 때문에 나의 감정을 외면한 대가는 너무 크다. 너무 늦기 전에 내 몸과 마음을 정성껏 돌보아야 한다.
풍요로운 삶이란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고, 우연을 기쁘게 받아들이며, 마음이 시키는 일을 하는 것. 더 이상 나를 증명할 필요가 없고, 집착하지 않으며, 내가 나여서 기쁜 삶이다. 시간의 유한함을 인정하고 삶의 속도를 늦추면 선물처럼 받는 보상이 있다. 그건 바로 현재에 머물 수 있는 능력, 평온, 그리고 해방감이다.

오 자히르
sarahbaek5@gmail.com

오자히르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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