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프라하육아 일기
<아름다운 겨울의 피날레>
분주하게 보낸 12월이었다. 12월 중순 즈음 나의 한해는 조금 빨리 마감되었다. 열흘간의 여행 일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많아서, 바쁜 시간을 보냈다. 하루하루 꾹꾹 눌러담아 열심히 살아 내며 되이려 현재에 사는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의미 없는 소모 없이 완전히 연소하는 기쁨이 있었다. 중간 중간 생각했다. 나를 망하게 하는 것은 아마 ‘책임감’일지도 모른다고, 그러나 나를 살게 하는 것도 ‘책임감’이기도 했다. 학기 말이 되면서 학교의 행사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하고, 나름 체코에서 삶을 오래 살아냈으니, 할 수 있는 일을 해보자는 마음먹었다. ‘해보자, 후회하지 말고.’ 그런 마음으로 살다 보니 저지른 일의 범위가 점점 커지고, 많아졌다. 내 몸이 고달프지만, 나는 안다. 머뭇거리면 기회는 지나가고, 완벽한 타이밍이란 없고, 결심이 때론 무용할 수 있다는 것을. 그러나 별생각 없이 저지른 것들은 늘 생각에 그치지 않고 현실로 만들어졌다. 올 한해 했던 큰 도전이 학부모운영위원회에 들어가 학부모 여행 오거나이저가 되는 것이었고, 또 하나가 아이들의 룸맘이 되는 거였다. 룸맘은 학급 파티나 선생님 선물 준비 등 학급 위한 행사 준비를 돕는 일을 한다. 큰 생각 없이 저질렀던 일은 물살처럼 거세게 나를 덮치기도 했지만, 그 휩쓸림에도 목숨은 붙어있으니, 시간이 흐르는 대로 가볼 수 있을 때까지 쓸려 가보기로 했다. 아니 뭐 어떻게든 되겠지!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프라하 거리는 반짝이는 조명이 어둠을 밝힌다. 오후 4시면 찾아오는 어둠에 마음이 지치고 슬프지 않도록. 12월이 되면 늘 설렘이 유럽 전역에 어른거린다. 크리스마스 상점, 거리의 크리스마스 장식들. 체코 가정집의 아기자기한 크리스마스 구유 장식. 크리스마스 마켓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계절용품점에 가서 식사하고 로컬 식료품을 샀다. 체코 할머니들이 집에서 크리스마스 리스를 직접 만드는 것을 보고, 전나무 가지와 리스 틀을 사서 돌아와 크리스마스 리스를 만들면서 시간을 보냈다. 체코는 유럽의 여느 나라처럼 대림절을 기념하는데, 크리스마스가 오기 전 4번째 일요일부터 시작한다. 그래서 한주 지나는 일요일마다 크리스마스 리스장식의 촛불을 한 개씩 키며 쿠키를 나눠 먹으며 크리스마스를 기다린다. 식탁장식으로 해두고 아이들과 크리스마스의 설렘을 느끼며 12월을 보내고 싶었다. 식탁에 크리스마스 식탁보를 깔고, 리스와 촛불을 놓아두니 조금은 포근해지는 느낌이었다. 테이블과 함께하는 동안에는 눈 닿는 곳곳이 따뜻하고 포근한 시간이 될 것 같다. 식탁에서 식사하며 시간이 머물렀다. 비록 겨울이지만, 춥지 않았다. 몇 해동안 혹독한 유럽의 겨울을 보내며 비로소 나의 온기로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했다. 시간을 설레임으로 채우고, 내가 오래 머무는 곳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이다.
천문시계 광장에 프라하에 크리스마스 시장이 열리고, 프라하는 크리스마스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득 찬다. 천문시계 광장 시장은 프라하에서 가장 규모가 큰 크리스마스 시장인데, 틴 성당 앞에 건물만 한 커다란 트리가 장식된다. 상점과 어우러진 풍경이 꽤 로맨틱하다. 그 분위기를 즐기기 위해 12월의 학부모 트립 장소로 정했다. 시장 구경을 하고 멋진 레스토랑에서 함께 식사하며 따뜻한 연말을 보내는 것이 목표. 크리스마스 시장에서 구경하고 사진 찍고, 글루바인 한 잔 들고 수다를 떨었다. 미리 예약해둔 레스토랑은 바로크 시대의 슈포르크 궁전을 고친 곳이었다. 오래된 건물에 현대적으로 개조 된 레스토랑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체코 코스 요리를 먹으면서 한참을 웃고 떠들었다. 서로의 겨울방학 계획을 나누면서 각자 나라에서는 크리스마스를 어떻게 보내는지 이야기 나눴다. 추운 연말에는 특히 이런 자리에서 더 서로에게 다정하고 친절해지는 것 같다. 가족들이 다 본국에 있는 외국인으로서 시끌벅적한 크리스마스 점심을 함께하며 나는 대가족의 북적이는 식사시간을 떠올렸고, 타국생활의 외로움과 고단함을 따뜻한 음식에 녹였다. 그래 우리는 뿌리가 뽑힌 것처럼 살지만, 그래도 이 삶이 주는 기쁨과 도전이 있으니 서로 촛불이 되어준다면 어둠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 시간을 기쁨과 감사로 채울 수 있을 것이다.
바쁜 와중에 메신저 앱과 메일함에 알람이 왔다. 아이들 담임 선생님에게서, 그리고 같은 학년 룸맘들에게서의 연락이었다. 이제 학기 말 파티를 계획해야 한단다. 윈터 파티라고 부르는데, 한 학기의 마무리를 축하하는 파티인데, 주로 동료 학부모끼리 인사도 하고 아이들 체험 활동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국제학교에서 일어나는 모든 행사는 상호소통적인 형태로 진행되어서, 모두가 주인공이고 함께 만들어간다. 이런 형식의 이벤트들은 학부모에게도 아이들에게도 공동체적 연대감을 느끼게 한다. 물론 학부모가 학교 행사에 참석하고 함께 만들어가야 하니 번거롭지 않은 일일 순 없다. 그러나 그 자연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아이들이 엄마·아빠의 모습을 스미듯 배운다고 생각한다. 타인에게 긍정적이고, 서로 돕고, 협조하고 긍정적인 관계를 맺는 모습, 그리고 그 공간의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아이들이 자연스레 어른과 친구와 선생님과 관계하고 사회를 신뢰하고 연대하는 방법을 말이다. 그래서 학급의 아이들은 한 학기만 지나면 누가 누구 엄마인지 다 알고 있다. 픽업 시간 또는 학교에서 마주치면 “안녕하세요 Suri 엄마~” 하고 지나가는 넉살 좋은 아이들도 있다. 나 또한 아이들 반 친구들의 이름을 다 알고 있고, 그 아이들의 부모와도 알고 지내며 매일 아침 인사하고 안부를 묻고 때론 같이 플레이데이트도 하고 슬립오버도 하면서 서로 육아 도우미가 되어준다.
이 모든 12월의 이벤트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다 보니 매 순간 돌파하는 시간을 보내야 했다. 룸맘 회의를 하고 파티 준비를 하고 동료 학부모에게 공지를 보내고, 파티 당일에는 미리 와서 파티 준비를 했다. 둘째의 유치부 반에서는 각 엄마가 체험활동을 맡아서 했는데, 쿠키 만들기, 캔들 만들기, 오렌지 크래블 만들기, 신년 카드 만들기 섹션을 준비하고(물론 재료, 간식, 세팅 은 다 학부모의 몫) 아이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곳에 가서 원하는 체험을 부모님과 함께 했다. 이것을 준비하는 과정이 순탄치는 않았다. 회의하고 각자 역할을 정하고 장을 보고, 파티 당일에 준비를 위해 일찍 도착했으나, 준비물을 가져오는 엄마들이 죄다 30분을 늦었기 때문이다. 1시간 동안 아이들이 바깥 활동을 하는 동안 교실을 꾸며야 했는데, 물품이 도착하지 않으니 나와 준비를 도와주러 온 엄마들이 멀뚱멀뚱 서 있었다. 30분을 남겨두고 짐을 들고 나타난 동료 엄마들은 도착하자마자 재빠르게 움직였다. 이미 시간이 촉박하자, 나는 정신이 혼미해져 우당 탕당, 손을 벌벌 떨면서 세팅을 하는데, 웃기게도 다들 바쁘고 다급한 와중에도 몇 번을 해본 것처럼 여유가 있었다. 차근차근 물품이 어딨는지 확인하고 준비하는데, 나만 허둥지둥하고 있었다. 사실 천천히 준비해도 아무 문제 없는데, 혼자 허둥거리는 것을 보며, 마음가짐을 좀 돌아보게 되었다. 그렇게 급할 게 있나 싶기도 하고 말이다. 웃기게도 급하게 하나 안 하나 모든 준비는 제시간에 완료되었다. 그냥 나만 허둥지둥한 사람이 된 것이다. 파티 시작 시간이 되어 아이들은 상기된 얼굴로 교실에 들어왔다. 엄마를 발견하고 해맑게 웃는 표정은 언제봐도 사르르 녹는 것만 같았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한다.”
학급 일을 도맡아 하면서 중요한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정확한 인지였다. 이 말은 연대와 협력과 함께 각자의 한계와 의사결정의 원칙을 관통하는 말이다. 용기 내 봉사를 선택한 룸맘들은 각자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그리고 완벽하려 하지 않을 것. 그냥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다. 모든 통제 할 수 없으니까 말이다. 엄마들과 파티 회의를 하면서 서로의 의견이 달랐던 상황이 있었지만, 매끄럽게 잘 넘어갔다. 모두가 좋은 마음으로 참여하고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기여하는 것이니 서로가 처한 상황을 이해하고 너그러이 받아들인 결과랄까.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각자의 의견을 내는 것은 자신의 책임 질 수 있고, 에너지를 쓰는 만큼 결정 권한이 있다는 것. 우리는 그것을 존중하며 파티를 꾸렸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그 원칙을 몸소 배웠던 경험이었다. 그 두 가지 학부모 행사에서 가장 많이 했던 말은 그거였다. “괜찮아 에스텔, 우리는 한팀이야 혹시 어려우면, 말해줘!” 우리는 문제를 지적하지 않고, 해결했다. 이 과정 중에 느끼는 어려움은 정서적인 부분이 많았다. 동의를 구하고 협조를 요청하는 일이 거절 감을 느끼게 할 때도 있었기 때문이다. 대부분 룸맘들이 물리적인 어려움보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려움을 느낀다고 한다. 아이들 선물 교환을 하고, 공동기금을 모으는 번거로운 일이었지만 기꺼이 함께 해준 동료 학부모들에게 감사했다. 이 상황의 최선을 선택하는 것이야말로 삶에 대한 유연한 태도가 아닐까. 용기 있는 도전과 기여가 의미 있을 수 있도록 우리는 서로의 동료가 되어주는 것. 서로 채워주는 것. 나는 동료 학부모들에게서 그런 것들을 보았다. 내가 대학생 때 겪은 조별과제 대참사가 아닌, 모두의 뜻과 책임을 모아서 함께 만들어 가는 ‘과정’을 말이다. 그것이 아이들이 학교에서 배웠으면 하는 인생의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한다. 서로의 기쁨을 응원하고 기뻐하고, 서로의 슬픔을 적절히 토닥이며, 이 순간의 과정을 함께 하는 것. 그 과정의 기쁨과 모두와 책임과 성취를 함께하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함께하는 법이 아닐까.
바쁘게 반짝이는 크리스마스를 보냈다. 내가 가진 범인류애가 사그라질 때는 타국의 엄마들이 내뱉는 따뜻한 말과 여유로운 행동에 작은 촛불이 켜졌다. 맹목적으로 목표에 몰두하는 나를 가다듬게 된다. 서로의 신뢰를 확인하면 못해낼 일도 없지. 잘 해내야 한다는 무겁고 진지한 책임감보다, 즐거운 마음과 따뜻한 선의에 집중하면 결과보다 과정을 즐길 수 있게 되니까 말이다. 피드백하고 개선할 점을 본능에 따라 찾아내는 한국인의 특성은 이럴 때 별로 필요가 없어 보인다. 게임의 규칙이 다른 공간이다. 학교는 작은 사회지만, 개선할 점보다, 즐겁고 행복했던 점에 집중해도 되는 곳이니까. 사회 냉혹한 시선을 굳이 학교에서 발동시켜 서로 주눅이 들게 하고 기운 빠지게 할 필요가 없는 것 같다. 아이들에게도 이렇게 압력 없는 공간에서 조금 느리겠지만 즐겁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타인을 신뢰하고 자신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라 믿는다. 겨울엔 나의 온기와 타인의 온기가 필요하다. 나는 여전히 여유롭지 못하지만, 이것을 함께 경험해보는 것만으로도 내가 살아온 방식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니까 말이다.
체코의 크리스마스에는 따뜻한 공존을 느끼게 한다. 크리스마스 시장에 모인 사람들, 따뜻하게 빛나는 크리스마스 시장을 찾는 사람들, 함께 식사를 즐기는 사람들, 착한 어린이에게 주는 선물이든, 학급만 친구가 주는 선물, 또는 학급 파티에서 얻어가는 즐거운 체험들, 따뜻한 핫초코, 이들은 그 따뜻한 공존을 느끼기 위해 진심으로 크리스마스를 준비하는구나 생각했다. 누구나 행복해도 되는 날. 누구나 함께해도 되는 날이다. 학기가 끝나가면서 아이들은 방과 후에 학교 극장에서 ‘나 홀로 집에 1’ 영화를 보았고 그림 그리기를 하며 보냈다. 평화광장의 크리스마스 시장에서 뜨르들로(굴뚝 빵)을 먹으며, 겨울의 어둠을 버텼다. 크리스마스까지의 날들을 끝까지 즐겨주는 것이 12월을 견디는 방법이 아닐까 생각한다. 지난한 겨울의 양식을 비축하는 과정, 한해의 마지막 피날레를 온 힘을 다해서 마무리하는 것. 크리스마스가 지나면 유럽 전역은 침묵한다.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봄까지 숨을 죽이고 기다린다. 겨울을 견디고 기다리고 기다리다 보면 부활절 연휴가 다가오고 더는 눈이 오지 않는 봄이 오겠지.
그러니 이 크리스마스가 더 따뜻이 빛나는 것 같다.

에스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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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전 어느 습관 만들기 프로그램에 참여한 적이 있다. 21일 동안 좋은 습관을 함께 실천하고 공유하며 매일 피드백을 받았다. 독서와 운동, 목소리 낭독, 명상, 10분 정리, 플래너 기록 등 여러 목록이 있는데, 내 삶을 가장 많이 변화시킨 습관이 있다. 그건 바로 ‘하루 1명 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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