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차가운 공기는 정신을 맑게 해준다. 불필요한 건 모두 가라앉고, 필요한 것만 남는다. 봄과 설렘과 여름의 소란, 가을의 아름다움도 지나가고, 오직 고요함만 남는다. 겨울은 하얀 눈처럼 깨끗이 마음을 비워내고, 나를 돌아보기 좋은 계절이다.
그리스에 온 지 벌써 1년이 지났다. 모든 게 다시 처음이었다. 타국에 있으니 나를 먼저 잘 돌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일과 육아, 집안일도 잘할 수 있을 테니까. 바쁘게 열심히 달리던 30대를 지나, 내 몸과 마음을 깊이 들여다본 지난 2025년.
마음과 영혼이 시키는 대로 살아가는 맑고 명료한 삶. 아무런 모순 없이 자연스럽고 편안한 삶. 존재만으로도 기쁘고 충만한 삶. 바라는 것도, 가지고 싶은 것도 없이 지금 이 순간 만족하는 삶. 남의 기대에 부응하거나 대단한 사람이 될 필요도 없이, 있는 그대로 감사하는 삶.
인생을 바꾸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사는 곳을 바꾸는 거라던 말을 온몸으로 느꼈다. 누구에게도 나를 설명하거나 증명할 필요가 없었다. 남의 시선을 완전히 벗어나, 나로 존재하는 기쁨을 온전히 누렸다. 나에게 중요한 가치, 스스로 정한 기준에 따라 선택하고 만족하는 삶은 얼마나 자유롭고 편안한지. 충분히 자고, 많이 웃고, 건강한 음식을 먹고, 소중한 사람들이 곁에 있고. 대단한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평온하게 살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요가와 명상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단정히 옷을 입는다. 따뜻한 커피 한 잔으로 시작하는 느긋한 아침.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시간을 내어 운동하고 산책한다. 아이가 좋아하는 요리를 준비하고, 자기 전 따뜻한 샤워로 몸과 마음을 정화한다. 눈에 온찜질을 하고 라벤더 오일 향을 맡으며 잠이 든다. 평범한 일상이 더없이 소중하고 특별해졌다.
무엇을 해야 한다는 마음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무엇을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마음은 삶을 더 가볍고 자유롭게 만들어준다. 무언가 성취한다고 해도 그 다음에 내가 하고 싶은 건, 여전히 가족과 맛있는 음식을 먹고 함께 웃으며 보내는 소소한 일상이다. 그걸 매일 누리고 있다면 이미 성공한 삶 아닐까. ‘지금 이 순간’을 오롯이 살고 있어 편안하다.
언제부턴가 바쁜 사람보다 여유로운 사람이 좋아졌다. 어쩌면 시간과 자기 관리에 서툴러서 바쁜 게 아닐까. 지난 몇 년간 나를 관찰하며 깨달았다. 나에게 소중한 걸 지키지 못하면서, 해낼 수 없을 만큼의 일을 받고 건강이 안 좋아질 정도로 일하는 것을 멈추었다. 많이 무너지고 다시 일어나며 서서히 나를 알아갔다. 이제는 나에게 주어진 시간과 에너지를 안다. 여유는 바쁨마저 통제하고 더 부지런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거였다. 불필요한 생각과 걱정, 관심을 버려야 한다.
이제는 시선을 나에게 돌려 내 삶을 단정히 돌보고 살피는 시기 같다. 내 안의 목소리를 존중하고, 세상을 명료하게 바라보아야 할 때. 낯선 타지에서 배운 삶의 기술이 있다면 주어진 것에 감사하기,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믿기, 계획대로 안 되어도 기쁘게 받아들이기다. 삶이 나를 이곳에 데려다준 건 분명히 이유가 있을 테니까. 지구에서의 삶을 경험하라고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면, 나는 그저 삶을 있는 그대로 느껴보고 모든 것에서 감사와 아름다움을 발견하면 된다.
새해가 왔지만 여전히 무기력한 사람이 있다면, 이 문장을 함께 나누고 싶다. 100년 후 우리는 모두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나와 남편도, 아이와 부모님도. 지금 이 순간 눈앞의 모든 것을 경이롭게 바라보고, 미움과 질투 대신 사랑과 감사를 느끼고, 내가 가진 걸 더 소중히 여겼으면 좋겠다. 영원할 것 같지만 유한한 삶을 생각하면, 지금 해야 할 일이 조금은 선명해지니까. 불필요한 걸 놓아줄 수 있으니까.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기쁨이니까. 새해에는 더 단순하게, 천천히, 가볍게 살고 싶다. 너무 심각하지 말고.

오 자히르
sarahbaek5@gmail.com

오자히르
번역가
단순한 삶 속에서 지혜와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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