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젠가부터 새해가 되면 2글자로 된 단어 하나를 떠올리곤 했다. 그게 내 이번년도의 좌우명이자 모토라고. 100세 인생 단 하나의 좌우명으로 쭉 끌고 나갈 수 없는 극 P인간인 나로서는 차라리 1년 단기 목표가 훨씬 나았다.
그렇게 쌓이다보니 내가 추구하는 삶의 방향성은 꽤나 다채로운 편이었는데, 그러면서도 내가 선호하는 단어들을 알게 됐다. 다(多)였다. 다양, 다정, 다면, 그런 대범한 단어들을 소심한 나는 좋아하고 닮고 싶어했다. 하지만 올해는 사뭇 달랐다. 올해는 아주 단호하게 명확이라는 단어를 지정했다.
“또 나만 급하지 또 나만 급해?”
하고 종종 거리는 나의 말에 아이는 “어. 엄마만 급해.” 하고 배시시 웃는다. ‘좀 더 서둘러 달라’는 나의 의도를 약올리나? 해서 보면 아니다. 아이는 엄마의 기분을 살피며 대답을 해야겠거니 하고 성심성의껏 대답한 것이다.
“여보, 혹시 티비 위에 있는 노트북 불편하지 않아?”
하고 ‘치우자’고 돌려 말하는 나의 제안에 남편은 “어? 그게 왜 불편해? 그게 오히려 더 편하지. 저렇게 쓰는 게 더 나아.” 말한다. 우회적인 돌려말하기가 더 이상 미덕이 아닌 사회에서, 나는 혼자 이른바 ‘쿠션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대학교 교양과목에서 말하기 수업을 들었을 때, 연령별, 성별, 지역별에 따라 말하기의 차이가 많이 두드러진다고 했다. 직설적이고 단호한 표현들이 선호되지 않고, 누군가가 상처받을까 두려워 제대로 된 의사표현을 돌려서 하는 경우가 있다. 누가 더 좋고 나쁘고가 아니라, 그냥 그런 현상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어느 순간 나는 가족들에게 의사를 구하고, 양해를 구하고, 우회적으로 내 심리를 알아달라고 하는 화법을 많이 쓰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화법은 고도의 심리전이자 눈치껏 파악해주어야 하는 관계로 눈치가 아직 발달하지 않은 어린 아이와, 눈치보기 지친 장년 어른의 에너지는 흡족하리만큼 쓰이지 않았다. 오히려 차라리 원하는 바를 정확히 얘기하라며 다투기 일쑤였다.
연말에 다른 가족과 함께 여행을 가서 물에 젖은 솜처럼 지쳐서 돌아온 날 여느때처럼 서로 좋은 기억이었다고 회고하던 중에 남편이 “편하다” 라는 표현을 썼다. 그 가족과 소통하는 게 편하다고. 편한 이유가 뭘까 생각해보니, 그 가족은 서로 쿠션어를 전혀 쓰지 않고 대화했다. 그냥 불편해질 것 같으면 얘기하면서 웃기만 했다. 너도 이해하지? 라는 듯이.
슬쩍 나도 남편과 아이에게 시도해봤다.
“너도 네 짐 챙겨. 엄마 바쁘니까.”
“티비 앞에 노트북 좀 치워. 보기 싫잖아.”
예상 외로 아무도 감정 상하는 사람 없이 재빠르게 일과가 돌아갔다. 나마저도 감정 상하는 일 없이. 이렇게 쉬운 거였나 싶어 황당했다. 그처럼 내가 남편의 기분을, 아이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고 생각한 게, 정말 헛된 일이었다는 게 기분 나쁘지도 않았다. 이제 앞으로 좀 더 명확하게 얘기하면 되니까.
올 한 해는 그래서 좀 더 명확하게 살기로 했다. 그렇다고 평생의 지향점인 다정을 버리는 것이 아니다. 방법과 표현을 좀 더 명확하게 갖기로 했다. 앞으로 살면서 얼마나 더 많은 의견 표시를 해야 될지 까마득한 100세 시대에 나는 내가 원하는 바를 조금이나마 명확하게 말하기로 했다. 유려하다거나 섬세하다는 표현들에 갇혀 숨어버릴 수 있는, 내가 원하는 바를 좀 더 걷어내면서 말하다 보면 어느샌가 나도 정확하게 내가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자연히 올해의 단어를 정한다는 것은 작년의 나를 자연스럽게 평가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작년의 나와 방향을 틀 것인가, 아니면 그대로 유지해나갈 것인가가 선명하게 보여지니까. 그래서 작년에 다양이었던 저는 올해 명확하게 여쭤봅니다. 과연 당신의 올해 단어는 무엇인가요?

youme
너와 나, 합해서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