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일을 기다리던 때가 언제였을까. 생일이 달갑지 않다. 결국 다 먹지 못할 홀케익을 사고 식당을 예약하고 고로 통장이 쪼그라드는 의식. “너 나중에 딴소리하기 없기야. 네가 안 한다고 했어!” 올 초부터 친구처럼 생일 파티를 키즈 카페에서 해달라는 아이의 마음은 실시간으로 바뀌었다. 여러 차례 다짐을 받아 내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불편하다. 평생을 우려먹을 거대한 꼬투리로 자랄까봐.
정작 남의 편 가족 생일만 실컷 챙기고 올해 내 생일은 완벽히 잊혔다. 원가족
채팅방에서의 축하 메시지면 충분하다 싶으면서도 생일이란 거 없어져 버리면 좋겠다는 억울함이 울컥 차오른다. 내
자식이 소중하면 응당 남의 자식도 같다는 상식이 TK에서는 통용되지 않는다. 감동 한 스푼 눈물범벅 두 스푼 따위는 상상 속에만 존재한다. 심드렁하고
건조한 생일 축하 카드를 졸라 받았다. 아이한테.
유일하게 기다리는 누군가의 생일은 크리스마스뿐. 빚쟁이와 고리대금
업자처럼 수혜자와 수여자, 이분법으로 나뉘는 셈법이 해당하지 않는, 그야말로
무해한 생일. 올해 백화점 크리스마스 래핑은 어떻게 장식했나 고대하며 아이를 데리고 서울로 향한다. 문토끼라 부르는 나의 시골 토끼에게 도시의 화려한 문명을 폭우처럼 퍼부어 줄 수 있는 절호의 찬스! 어쩌면 한껏 달뜬 너의 동공 속에서 함께 들뜬 내 모습을 보고 싶은 걸지도
.
클래식이 불변의 진리라지만 바뀔 생각이 없는 크리스마스트리와 장식이 왜 매번 반가운지. 혹한기에 접어든 날씨에 인파로 미어터지는 명동 한복판은 왜 12월이면 회귀하는 연어처럼 거슬러 올라가는지. 평소라면 하지 않을 선택의 총집합이 한데 버무려진다. 세 시간 뒤에 일어나 미리 신청한 아이 체험에 들렀다가 기어코 명동으로 가려 철도 노조 파업 사태 속에 어렵사리 KTX 좌석을 잡았다. 어쩌면 기억조차 하지 못할 아이를 핑계로 내 추억을 만들러 떠나는 것이다.
그건 생일에 대한 올해의 트라우마를 떨쳐내는 일종의 씻김굿 같은 걸지도 모른다. 한여름에도 캐럴을 틀어 놓고 12월을 기다리는 것도. 상술인 걸 알면서도 어드밴트 캘린더를 일찌감치 사두는 것도. 귀찮아서 결국 디피도 안 할 크리스마스 소품을 야금야금 사 모으는 것도. 올해의 쌓인 액을 털어내고 좋은 기운으로 치환하는 내적 의식이 되어버렸다.
산타가 거짓이라는 사실을 안 순간부터 내 믿음은 자라기 시작했다. 착한
어린이가 아니라 착한 어른이 되면 만날 수 있을지도 몰라. 세상에 소수점 자리 숫자만큼 찾기 어려운
그런 존재는 어떻게 될 수 있는 건지 모르지만. 어차피 허상이라면 일곱 빛깔 찬란한 갈퀴를 흩날리며
천상을 누비는 유니콘이 산타로 변장해 내려오는 것일지도. 그런 막연한 상상만으로도 캐럴은 연중무휴로
플레이된다. 내 달팽이관에서.

youme
너와 나, 합해서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