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1월 7일 금요일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을 읽었다. 이번에 두 번째로 읽었는데 처음 읽었을 때와 느낌이 사뭇 다르다. 그땐 몰랐는데 첫 번째로 읽을 땐 홍보용 서평이나 한줄평에 근거해서 책을 읽었던게 아닐까 싶다. '여성이 쓴 첫 공포소설이자 SF소설.' 여기서 더 나아간 느낌이 없었다. 그래서 큰 감명도 없었다. 이번에 다시 읽을 땐 새로웠다. 캐릭터들의 각자 역할이 선명하게 보이고 그래서인지 더 입체적으로 느껴졌다.
프랑켄슈타인은 '남자'를 대표한다. 그는 mankind의 'man'을 상징한다. 그렇게 보이니 이 소설은 하나의 블랙코미디였다. 영화 <어쩔수가없다>의 만수가 떠오른다. 프랑켄슈타인은 '어쩔수가없다'며 자신을 위해, 가족을 위해, 또 거창하게 인류를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그 모습은 허탈한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한 가지, 프랑켄슈타인과 만수의 다른 점이 있다면, 프랑켄슈타인은 어쩔수가없다며 도망가고 회피하지만 만수는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일을 저질러나간다는 점이 있다.
그런 'man', 프랑켄슈타인이 창조한 괴물은 어떤 사회적 산물로 보인다. 어떤 정책이나 이념, 또 오펜하이머의 핵폭탄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는 자신의 창조물을 만들 때 엄청난 열정에 사로잡혀있었다. 주변의 사람도, 충고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그런 그가 하나의 창조물을 만들었을 때, 그때 그는 비로소 눈을 뜬다.(실제로 눈이 멀었었다는 말이 아니다.) 자신이 만든 것이 아주 끔찍하며 무언가 많이 잘못된 존재라는 걸 깨닫는다. 하지만 그 창조물은 이미 그의 손을 떠났다.
이후 일어나는 사건들을 겪으며 그는 바로잡으려고 노력하기보다 오히려 숨기고 도망친다. 자신이 일련의 사건들의 출발점이며, 자신만이 알고 있는 진실들을 숨긴다. 그는 말을 해봤자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거라고 변명하지만 결국은 자기의 실패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거다. 후에 월튼에게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북극행을 추진하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그의 속마음이 드러난다. 참으로 비겁하다.
월튼도 이 소설에 등장하는 또다른 'man'이다. -프랑켄슈타인의 아버지나 친구 클레르발, 동생 윌리엄은 'man'이 되지 못한다. 아버지는 노인이고 친구는 상인의 아들이며 동생은 성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man'에 평민과 노예, 유색인종이 포함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유이다.- 월튼은 프랑켄슈타인과 다른 길을 간다. 북극 항로를 개척해 인류에 도움이 되겠다는 열정을 품고 실행에 옮기는 것까지는 같으나 그는 선원들의 목숨이 위험에 처하자 항해를 포기하고 뱃머리를 돌려 고향으로 향한다. 아무리 큰 포부와 원대한 꿈, 인류의 발전을 위한 행동을 한다고해도 그것이 어떤 희생과 결과를 불러오는지 충분히 고민하고 주변 사람들과 의논해야 한다. 그 점이 프랑켄슈타인과 월튼의 다른 점이다.
그러니 '어쩔수가없다'는 말만 반복하지 말고 주변을 돌아보자. 당신의 주변엔 클레르발이 있고 엘리자베스가 있으며, 미리가 있다. 반성과 성찰의 마음으로 이 책을 대하자.

에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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