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과 일기를 쓴다. 될 수 있는 대로 매일. 잊힐 말과 감정, 생각, 마음을 붙잡기 위해서다. 하루의 끝에 앉아 오늘 있었던 일을 떠올리면 작은 장면들이 스쳐 간다. 흙을 털어내던 신발, 미처 다 닦지 못한 입가의 초콜릿 자국, 그리고 그때 웃던 얼굴. 그 순간들을 그냥 흘려보내기엔 아쉬웠다. 그렇게 우리는 일기를 시작했다.
처음엔 ‘먹었다’, ‘또 먹고 싶다’, 그것뿐이었다. 문장은 짧았고, 감정은 단순했다. 그러나 그 안에도 아이의 하루가 있었다. 먹었다는 말 뒤에는 친구와 나눴던 과자의 맛, 기다렸던 간식의 기쁨, 혹은 혼자 먹었던 작은 외로움이 숨어 있었다. 나는 그 문장 속에서 아이들의 마음을 읽으려 했다. 그렇게 매일 조금씩, 아이들의 문장은 자랐다.
오늘은 친구랑 다퉜는데, 미안하다고 말 못 했다.
바람이 코를 찔렀다.
어느 날은 그렇게, 마음이 문장으로 흘러나왔다. 아이의 어휘 속에 감정의 결이 깃들기 시작했다.
일기를 쓰지 않겠다고, 오늘은 힘들다고, 연필을 탁 놓는 날도 있다. 그런 날의 기분을 안다. 쓰기 싫은 날, 마음이 무거운 날, 어른도 있다. 그래서 오늘은 쉬어가자고 말한다. 대신 다음 날엔 두 개를 쓴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 두 명이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셈이다. 아이들에게도 말한다.
“하루 늦게 쓰면, 마음 대신 기억이 대신 써버리기도 해.”
아이들도 서서히 알아가고 있다. 일기는 그날의 마음으로 써야 한다는 것을.
시간이 흐르며 우리의 일기는 점점 이야기가 되어갔다.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서로의 하루가 얽힌 하나의 세계가 만들어졌다. 오늘은 엄마가 화냈다는 문장 옆에는 “미안했어.”라는 내 글이 이어진다. 글은 대화가 되고, 대화는 관계를 다독인다. 때로는 웃음을 남기고, 때로는 눈물을 남긴다. 하지만 결국엔 우리를 이어주는 실이 된다.
일기를 함께 쓰며 알게 된 건, 아이의 하루가 곧 나의 하루라는 사실이다. 내가 놓친 순간들을 아이가 기억하고, 아이가 흘려보낸 감정을 내가 붙잡는다. 그렇게 하루는 서로의 글 속에서 완성된다. 아이의 문장 옆에 내 문장이 놓이며,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배운다.
일기가 우리에게 그저 기록으로만 남지 않기를 바란다. 언젠가 이 일기들이 모여 한 권의 책이 된다면, 그것은 우리 가족의 작은 역사이자 함께 걸어온 마음의 지도일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사소한 기록일지 몰라도, 우리에겐 살아 있었던 시간이다.
나는 오늘도 아이들과 마주 앉아 묻는다.
“오늘은 어땠어?”
“가장 행복했던 소리는?”
“남기고 싶은 이야기는?”
아이는 잠시 생각에 잠긴다. 그리고 펜을 든다. 짧지만 진심 어린 문장이 종이 위에 내려앉는다. 그렇게 하루가 글이 된다. 오늘의 공기, 마음의 온도, 말하지 못한 감정까지 그 안에 들어 있다. 내일의 우리에게 남겨줄 단 한 줄, 그것이 우리에게 일기의 이유다. 그렇게 아이들의 일기 속에는 나도 모르는 세계가 피어난다. 그 세계는 단어보다 솔직하고, 문법보다 살아 있다.
<예주의 일기 중에서>
_쥬쥬와 메시(강아지 이름)를 다시 만났다. 짖고 있었지만 왔냐고 반갑다며 인사를 해주는 것 같았다.
_수영을 했다. 물은 얼음이 아니었지만 차가워서 내가 얼음이 된 것 같았다. 몸은 떨리고, 이빨이 부딪힐 만큼 추웠다.
_갈증이 났다. 목이 촉촉해질 때까지 물을 마셨다.
_이곳에는 KFC가 있다. 하지만 아빠가 만든 치킨이 더 맛있다. 이제는 KFC에서 안 사도 될 것 같다. 물론 아빠가 만드느라 힘들겠지만.
_나는 메뚜기를 잡고 또 잡았다. 그런데 풀들이 나를 간질였다. 풀이 메뚜기를 보호해 주려는 것처럼 보였다.
<주안이의 일기 중에서>
_체육 시간에 비가 내렸다. 비를 맞으며 하니까 바다에서 하는 느낌이었다.
_배가 아파 학교에 못 갔다. 집밥을 먹고 레고 조립도 하니 천국에 온 기분이었다.
_오늘은 모든 것이 뒤죽박죽인 날이었다. 쉬고 싶다.
_치즈가 늘어나고 따뜻했다. 이 맛은 절대로 파도에 밀려갈 수 없는 맛이라고 생각했다. 햇빛 아래서 쉬는 것 같았다.
_기타 레슨에서 새로운 것을 배웠다. 새로운 걸 배우면 기분이 바람처럼 살랑거린다.

기록하는비꽃
작가
우간다에서의 일상을 글로 씁니다. 『일상의 평범함을 깨우다』를 펴냈고, <포포포매거진 뉴스레터>에 삶을 기록 중입니다. 좋아하는 것을 덕질하며, 해낙낙하게 살아갑니다.
은중과 상연, 그리고 안효섭까지
책상 조명에 의지한 방 안에서 드라마 <은중과 상연>을 보는 동안 감정은 점점 더 무겁게 가라앉았다. 은중의 고통은 단순한 서사의 장치가 아니라 가슴을 압박하는 현실처럼 다가왔고, 상연의 흔들림은 머릿속 깊은 곳까지 파고드는 떨림으로 남았다. 장면마다 숨을 고르지 않으면 따라…
잠시, 한국으로 가는 길목에서
두 달간 한국에 다녀올 예정이다. ‘잠시’라는 단어를 붙였지만, 마음속 무게는 잠깐이 아니다. 이곳, 우간다에 익숙해진 몸과 마음을 다시 움직여야 한다는 것. 그 자체가 작은 이사 같고, 중형 프로젝트처럼 느껴진다. 떠날 채비를 한다는 것은 단순한 여권과 항공권, 짐 가방 이상의 일이다…
발목을 붙잡는 손
한 달이 되어간다. 한국에 도착한 그날부터 지금까지, 시간은 빠르게 흐른 듯하지만, 그 속은 조용히 가라앉은 물처럼 무겁게 차 있었다. 머릿속엔 ‘머피의 법칙’이라는 단어가 자주 떠올랐다.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일들, 뜻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 시간, 그 모든 것이 어떤 법칙이라도 되…
감정은 따라오지 않아도 삶은 흐른다
공항 대합실. 사람들의 소란스러운 발걸음과 소리 없는 밀침이 한데 뒤엉켜 있었다. 짐을 끄는 바퀴 소리, 초조한 숨결, 손짓 대신 몸으로 길을 터주는 움직임까지, 무질서의 질감이 공기 속에 퍼져 나갔다. 낯설지 않은 풍경이었다. 오히려 이 장면은 익숙했다. 이 익숙함은 곧, 한국에서 점…
라디오 스튜디오에서 안부를 묻다
오래전 장면이 돌아왔다. 냄새도, 소리도, 그 공간에 흐르던 공기까지. 다시는 닿지 않을 줄 알았던 시간의 조각들이 손에 잡힐 듯 선명해지는 순간은 늘 예고 없이 찾아온다. 이번엔 정말 그랬다. 20년 만에 다시 찾은 방송국, 그 문을 들어서자마자 익숙한 냄새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복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