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안이는 레고를 맞출 때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작은 손가락으로 조각들을 꾹꾹 눌러 끼워 넣을 때마다 얼굴빛이 반짝인다. 변신 로봇 이야기를 할 때는 눈이 더 커지고 목소리에는 힘이 붙는다. 그런 아이가 어느 날 저녁, 방바닥에 흩어진 레고 조각 사이에서 불쑥 물었다.
“엄마, 레고 공인 작가가 되려면 나중에 커서 말이야. 어떤 대학에 가야 돼?” 아직 5학년인데 ‘어떤 대학’을 묻는다니, 웃음이 났다. 하지만 아이 얼굴은 진지했다. 대충 넘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차분히 대답했다.
“레고는 만들기인데 설계가 필요하고 디자인도 필요하잖아. 건축을 전공하면 도움이 되고, 디자인을 공부해도 좋지.” 주안이는 금세 반응했다. “집 짓는 그거야? 뼈대 만드는 거니까 레고에 도움 되겠구나.” 말끝이 신나 있었다. 마치 벌써 건축가가 된 듯, 손에 쥔 블록을 똑바로 세워 올리며 뼈대를 흉내 냈다. 그러다 잠시 멈추더니 다시 물었다.
“근데 건축을 공부하면 건축만 해야 하는 거야?” 그 물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정말 알고 싶다는 눈빛이었다. “꼭 건축만 해야 하는 건 아니야. 건축을 공부했더라도 다른 일로 넓힐 수 있어. 대학에서는 전공이 있긴 하지만, 어떤 경험을 쌓느냐에 따라 다 연결될 수 있거든.”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금세 또 궁금증이 솟은 모양이었다.
“대학을 졸업하면 그다음은 뭐야?” “직장을 갖고 일을 할 수도 있고, 아니면 더 공부할 수도 있지.” 잠시 생각하던 주안이는 결심한 듯 말했다. “아, 그럼 나는 좀 더 공부해야겠다.” 그 순간 웃음이 나왔지만, 마음 한쪽이 뭉클했다. 아직은 변신 로봇과 레고에 빠진 아인데, 언젠가는 자기 앞길을 그려가려는 마음이 조금씩 자라는구나 싶었다. 보통의 대화라면 느낄 수 없는, 아이의 성장이 느껴지는 자리였다.

며칠 전, 부엌 한쪽에서 아보카도가 익기를 기다렸다. 손으로 살짝 눌렀을 때 말랑해진 걸 보고 칼을 넣었다. 반으로 가르자 속은 선명한 연둣빛이었다. 고소함이 가득할 게 분명했다. 아이의 질문도 꼭 그 아보카도 같았다. 아직은 단단한 껍질에 싸여 있지만, 어느 날 갑자기 영글어 속을 드러낼 날이 올 거다. 다음 날 아침, 주안이는 학교에 가기 전 다시 레고 상자를 열었다. 이번에는 설명서를 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집을 짓기 시작했다. 창문을 크게 내고, 옆에는 작은 정원을 붙였다. 블록을 붙이며 말했다.
“이건 사람들이 살 수 있는 집이야. 건축가는 이런 걸 만드는 거지?”
순간 대화가 이어지고 있음을 알았다.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앞으로 어떤 길을 가든, 묻고 생각하고 다시 만드는 그 반복이 단단한 힘이 될 거라고. 레고 조각이 처음엔 흩어져 있지만, 하나하나 끼워 넣으면 튼튼한 구조물이 되듯이, 아이의 질문과 경험도 모이면 언젠가 자기만의 설계도를 완성할 테지. 그날이 올 때까지 옆에서 묻는 말에 귀 기울이고, 대답해 주고, 지켜봐 주는 일- 그게 지금 내가 해줄 수 있는 가장 든든한 응원이라고 생각했다.

기록하는비꽃
작가
우간다에서의 일상을 글로 씁니다. 『일상의 평범함을 깨우다』를 펴냈고, <포포포매거진 뉴스레터>에 삶을 기록 중입니다. 좋아하는 것을 덕질하며, 해낙낙하게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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