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프라하 육아일기
엄마표 썸머캠프 생존일지 <엄마는 혼수상태>
“엄마 2층에서 자고있을 거야….큰 일 아니면, 엄마 좀 쉬게해주라…”
2층으로 올라와 방문을 닫았다. 문을 잠궜다. 머릿속의 신경이 툭 떨어져 나가고 비로소 숨이 쉬어지는 것 같았다. 방학 5주차였다. 하루하루 눈을 뜨는 것이 이렇게 힘들며, 별일 없이 반복될 매 끼니가 이렇게 버거울 줄이야. 거실에서 아무리 제 할 일을 해도 한 공간에 아이들과 있으면 아이들과 연결된 신경다발이 나를 옭아매는 것 같았다. 시도 때도 없이 배고프다는 소리와 엄마를 하루에 오천번도 부르는 것 같은 상황에 소리를 꽥!하고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즈음에 나는 유독 잠이 많아 졌다. 자도 자도 피곤하고, 또 자고 싶은데, 속 깊은 곳에는 뜨거운 숨이 나왔다. 이런 걸 천불난다고 하지? 그래 속에 천불이 났다. 아이들 인생 살아주느라 내 인생을 못사는 이 모든 순간에! 흥! 그런데 뭐 어쩔꺼야 별 수 없지. 잿더미같은 마음을 툭툭 발로 차서 타오르는 불씨를 꺼버리고 이내 까무룩 잠에 들었다. 한 두시간 즈음 지났을까? 아이들이 노는 소리가 1층에서 들리고, 기분은 한결 나아졌다. 아무 일 없는 듯 거실로 내려갔다. 그리고 여전히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껴안고 엄마를 쉬게 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했다. 하루 종일 돌밥돌밥에 끝이 없는 집안일을 하면서 아이들 공부를 봐주고, 커피 한잔으로 나를 위로하다보면 또 점심때가 되어 밥을 차리는 여름방학이다. 국제학교의 여름방학은 무려 9주나 된다. 2달 가득 아이들을 끼고 살 생각을 한 과거의 나를 어쩌면 좋을까. 후회한다. 후회해.
체코에서 여름 방학을 견디는 방법은 2가지가 있다. 첫번째는 돈을 써서 썸머캠프에 보내는 것이고, 두번째는 돈을 써서 엄마표 캠프를 하는 것이다. 물론 내가 선택한 것은 후자였다. 몇번의 여름 방학을 보내면서 썸머 캠프가 아이들에게 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 같아서 이번에는 내가 좀 고생을 하더라도 알차게 방학을 보냈으면 하는 마음이었는데, 역시 모두가 계획은 있다. 얻어터지기 전까지.
아이들이 레슨에 들어가거나 할 때 장을 보고, 쉬면 쉬어지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그랬는데! 잘못된 생각이었다.
오로지 아이들이 배움의 확장이 있기를 바랐다. 그리고 지루한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궁리하는 것도 아이들에게 필요하니까! 그리고 내가 조금만 고생하면 되지! 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시작은 호기로웠다. 방학이 시작되고 바로 빠리 여행에서 폭염으로 지져지고, 첫 2주 동안에는 수영집중 코스를 들었다. 수영 캠프는 아니고, 하루 1시간 반정도 수영 강습을 듣는 건데, 아이 둘을 한번에 넣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매일 아침 아이들은 나와 수영장으로 출근했다. 수영 수업이 마치면 집으로 가거나 근처에서 식사를 하고 영어도서관을 갔다. 그리고 어떤 때는 피아노 레슨, 어떤 때는 집에서 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수영 레슨 라이딩을 하면서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오, 생각보다 내 에너지가 많이 쓰였고, 아이들이 레슨 들어가 있는 동안 충전이 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방학 1~2주차 <이건 좀 잘못 된 것 같아>
정말 이건 좀 잘못 된 것 같다. 뭔가 착오가 있었다. 아이들은 분명 수영을 좋아하고, 또 체코에서는 영법 위주로 수업을 받는다기보다는 잠영을 배우거나, 물 속에서 잘 노는 법을 배운다. 수영장에서 튜브없이 구명조끼없이 정말 잘 논다. 그런데 나는 하루하루 땅 속으로 푹푹 꺼지는 것 같았다. 분명, 아이들은 알차게 보내고 있는데 왜 이렇게 힘들지? 엄마는 할 일을 모두 해냈을 때, 진정한 휴식을 취한다. 아이들이 없을 때 미리 반찬을 준비하거나, 집안 청소를 하고, 한 숨 돌리고 쇼파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며 잠깐의 여유를 만끽할 때 급속 충전이 이루워지나, 아이들이 레슨 받는 동안 집에 가서 집안일 까지 해낼 시간은 충분치 않으니, 할 일은 밀린 채 시간을 보내는 느낌이랄까. 그리고 끊임없이 들리는 아이들의 나를 부르는 소리와 질문은 잠시 잠깐도 쉬지 못하는 소진감을 주었다. 게다가 이때 남편의 부재로 풀육아를 하면서 텅빈 눈동자가 되었다. 세상에! 학교 선생님, 유치원 선생님 정말 존경합니다.
방학 4~5주차 <위기의 엄마>
여름휴가 직전까지 나는 그로기 상태였다. 살이 점점 빠졌던 것 같고, 이상하게 기운이 없고 축 쳐졌다. 수척해진 모습이 안타까웠던지, 두번 정도 친한 언니네 집에서 밥을 얻어먹고는 조금은 살 것 같았다. 밥을 한다는 것은 얼마나 수고로운 노동인지 모른다. 하루 세 끼를 먹이고, 간식까지 챙기면서 머리가 멍-했다. 방학 5주차 무렵이었다. 그즈음에는 모두가 지친 상태라 육아 품앗이를 한다. 가까이 사는 친구들과 플레이데이트를 번갈아 하면서 하고, 가끔씩 아이들을 데리고 카페에 가서 커피 수혈을 했다. 그렇게 남이 해주는 음식, 커피를 먹고나면 조금 살만했다. 육아 품앗이로 둘째가 플레이 데이트를 갔고 3시간 정도 시간이 생겼을 때, 어디든 뛰쳐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아무 생각없이 둘째를 친구네 데려다 준 차림 그대로, 첫째와 함께 까를교로 내달렸다. 여름 햇볕에 모자도 선글라스도 없이 슬리퍼를 신고 나온 프라하 구시가지. 관광객들이 붐볐고 나름 나들이 나온 기분으로 첫째와 걷고, 상점 구경을 하고 뜨르들로를 사먹고 까를교를 걸었다. 북적북적한 관광지에 꾀죄죄한 엄마와 아들. 둘이서 안간힘을 다해 셀카를 찍고 있는데 한국인으로 보이시는 분이 영어로 우리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했다. 어쩐지 그래야 할 것 같아서, 입을 꾹 다물고 외국인인 척했다.
방학 6주차 <번아웃 그리고 극복>
인공호흡기를 뗀 것 같았다. 여름 휴가 기간 동안 남편에게 기대어 살면서 조금 변했으나, 다시 온전히 나의 힘으로 끌고가야하는 일들 쌓였다. 이제 절반의 반환점을 돌았다는 것이 새삼 놀랍고 아직도 여름방학이 지나온 만큼 더 남았다는 사실이 절망스러웠다. 이 쯤부터 보낼 수 있는 썸머캠프를 찾아보기 시작했던 것같다. 사실 이 시기는 아이들의 습관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심심한 날들 속에서 자기 일을 하고 자기들끼리 놀이를 찾아 상상의 나라로 떠나고, 초반에 힘들게 잡았던 아이들의 습관들이 자동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기력이 없었다. 겨우겨우 밥을 차리고 커피를 연료삼아 살았다. 일부러 밖으로 나가는 일정을 잡고 싶었으나 체코의 대부분 여름 휴가를 떠났고 꼼작없이 아이들과 집에 있어야 했는데, 그때 마침 오르간 축제가 있었다. 프라하성에서 열리는 오르간 연주회를 가기위해 오후까지 풀충전을 하고 저녁먹기 전에 나서서 아이들과 아이스크림도 먹고 오르간 연주도 보고, 프라하성 구경도 하고 밖에서 외식을 하면서 기분 전환을 극적으로 해냈다.
방학 7주차 <아빠 찬스>
더이상 못참겠다. 남편이 있는 지역로 내려가서 퇴근한 남편과 조용하고 심심한 날들을 보냈다. 물론 남편과 함께 있으면, 집안일에 대한 비중을 줄일 수 있다. 아이들은 아빠와 더 가까운 시간을 보내고, 심심하지만 아빠를 기다리는 삶은 우리에게 윤활유가 되었다. 낮시간에는 할당량의 할일을 하고, 저녁에는 아빠와 시간을 보냈다. 남편 덕분에 주말에 4시간 정도 자유부인의 시간을 가지고 방학 이후로 생긴 내 마음 속의 원한이 녹아내리고 온화한 모습이 되었다. 그 동안 아이들과 근교 여행도 하고, 카페도 하면서 북적한 도시를 떠나 한적한 시골에서 보내는 시간이었다.
방학 8~9주차 <개학 임박>
방학이 드디어 끝나간다. 아찔했다. 그리고 이제는 어느 정도 해탈을 했다. 밥이 세끼고, 간식이 세번이지만, 이제는 배고프다는 대로 뚝딱 만들어내지 않고, 한번 참아보라하기도 하고 우유를 쪼로록 컵에 따라주기도 했다. 꾀도 늘고 아이들과 이 생활에 젖어 아침에 일찍 일어나 내가 자는 동안 할일을 부지런히 했다. 수영장도 가고 도서관도 가고 둘이서 놀기도 하면서 여름방학 동안 부쩍 자란 모습이다. 방학동안 나는 부쩍 잠이 많아졌는데, 침대 맡에 상을 펴두고 아이들이 아침에 일어나면 볼 책들을 챙겨 놓았다. 그러면 아이들이 일찍 일어나 책을 보고, 내가 일어날 때까지 얌전히 시간을 보냈다.
잘 지나왔다. 그동안 어떤 것도 생각하지 못하고 오로지 방학을 어떻게 보내고, 오늘은 또 먹고 내일은 또 무얼 할지로 머릿속이 가득 차있었는데, 끝이 보이니 아무렴 어때? 해탈의 경지에 올랐다. 아이들은 날마다 정원관리를 했고, 나와 시간을 보냈고, 지루한 여름방학의 시간을 지나왔다. 어쩌면 내가 본 하이틴 영화 속의 주인공처럼 여름방학의 지루함 속에서 성장의 계단을 자신도 모르게 밟고 올라갔는지도 모른다. 이제 모든 것을 미화하기 시작했다. 2층으로 올라가 방문을 잠구던 순간에도, 아침 일찍 일어나 수영장 픽드랍을 하던 일도, 나는 내 자리에서, 너는 네 자리에서 잘 견뎌냈다면 어떤 선택이든 틀린 것은 아닐거다. 원래 어떤 고통도 지나고나면 모두 아름다운 순간이 될 뿐이다. 고군분투한 8주차의 방학, 이제 1주일 남았다.
하하하 나는 안죽었고, 살아남았다.
에스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