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글을 쓰기 시작한 건 임신 사실을 알고 3개월쯤 지난 뒤였다. '다시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다니 좀 거창한 느낌이 들지만 한동안은 글자로 내 생각을 표현하는 일이 드물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다. 당초에는 내 생애 처음 겪어보는 (아마도 마지막일) 임신과 출산, 육아의 경험을 기록하려고 글을 적기 시작했다. 사실 나를 위한 글쓰기라기보다는 태어난 아기가 먼 훗날 자신의 어린 시절은 어떠했는지, 무엇을 잘하거나 어려워했는지 등 구체적인 질문을 던지는 날이 오면 상세히 답해줄 수 있도록 기록을 남기려는 목적이 우선이었다.
쓰고 싶은 이야기가 차고 넘쳐, 돌이켜보면 제발 모두의 머릿속 깊고 깊은 음험한 계곡에 숨겨진 채로 다시는 나오지 않았으면 하는 글을 써 돌리던 때도 있었지만 말이다. 다시 글을 쓰려니 도무지 쓸 말이 떠오르지 않고 첫 문장을, 한 문단을 써 내려가기 그렇게 힘이 들 수가 없었다. 다행히 여러 마감 동료를 만나 종종 숙제처럼 글을 적다 보니 최근에는 '엇, 이건 글로 남겨두고 싶은데!' 하는 순간이 자주 찾아온다. 어느덧 글쓰기는 나와 함께 살아가는 아기나 내 글을 읽을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결과물이기보다는 내 생각을 정리하고 남겨두는, 나를 위한 시간이 되었다.
문제는 그야말로 '뒤돌아서기 무섭게' 사라지는 생각을 다시 떠올리기 쉽지 않다는 점인데, 매일 성실하게 일기를 적거나 메모를 자주 남겨두어야지 하는 다짐만 백만 번째다. 결코 독창적이거나 흥미로운 소재는 아니지만 내게는 소중한 일상의 기록이자 삶을 풍요롭게 하는 소소한 알아챔이라 못내 아쉽다. 결국 내가 변하면 될 일이지만 마음을 굳게 먹었다가도, 스스로를 배신하고, 게으른 자신을 비난하다 다시 공상에 빠지는 일의 연속이다. 바뀌지 않는다 하여 바꾸려 하지 아니할 수는 없으니 어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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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지하철 개찰구에 카드를 가져다 대며 생각했다. 몇 년 전까지도 1시간 안팎의 거리는 되도록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보다는 걸어서 이동했다. 교통비를 아끼려는 생각도 있었지만 걷는 동안 만나는 새로운 세상이 참으로 즐거웠다. 같은 거리를 걸어도 매일 마주치는 사람이, 나무가, 바람이 달랐다. 20년이 넘도록 서울의 중심부에 살았으니 곳곳을 내 발로 걸으며 쌓아온 애정이 남달랐다. 특히 서울의 원・구도심에 대해서라면 누군가 단어 하나만 던져도, 그 풍경이 눈에 선하여 줄줄이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을 정도로 다녀보았다 자부했었다.
'무슨무슨 길'이라는 이름이 붙은 골목에 비슷비슷한 카페와 음식점이 생겨나면서부터는 '서태기(서울+권태기)'가 왔다. 좋아하는 건 일로 하지 말라더니, 공동체 중심의 도시재생 정책사업에 밀접하게 관계를 맺게 된 뒤로는 더욱 서울로부터 마음이 멀어졌다. 서울과 격리되고서야 비로소 이 도시가 내게 어떤 의미였는지 깨달았다.
출산 후 아기를 돌보는 16개월 동안, 몸도 마음도 내 인생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무인도에 사는 듯했다. 나 혼자 살아가는 외딴섬에 종종 고마운 친구들이 찾아와 주었지만, 만나고 돌아서면 더 깊은 외로움이 찾아왔다. 아기가 태어난 뒤로 9개월이 경과하였을 때에 드디어 서울의 거리를 걸었다. 남산을 넘어, 지인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을지로를 걸었다. 영화 일을 하던 시절, 세운상가 도시재생에 참여하던 때에 수도 없이 걷던 길이지만 마치 다른 나라에 여행이라도 온 듯 낯설었다.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았던 고독이 내 안에서 완전히 소멸한 줄 알았던 갈망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친구와 더 자주 이야기를 나누고 어깨를 마주하고 싶어졌다.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무언가 일을 만들고, 서울의 거리를 누비고 싶어졌다. 서울이 아니어도 좋겠지만 이 도시는 여전히 내게 오래된 친구와도 같으니 말이다.




한도리
N잡러
세 명이 한 가족, 섬에 살아요. "좋은 일 하시네요!"라는 말을 자주 듣는 업종에 종사하고 있어요. 주위를 둘러보며 걷기를 가장 좋아해요. 때로는 영화를, 소설을, 친구의 이야기를 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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