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거지에게 미용실과 치과는 동일 선상에 있다. 일년에 한 번이면 족한 연례행사. 우주선 모양의 기계가 머리칼을 아나콘다처럼 휘감는 동안 시선은 노트북에 고정. 자고로 미용실은 잡지 정독의 산실이건만 정작 잡지 발행인인 내겐 이번 달 별자리 운세를 볼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좌표를 이탈하면 찌릿찌릿 올라오는 모근의 비명을 인지하는 찰나. 헬멧 모양 기계를 뚫고 스팸일지 모를 낯선 국가 번호도 일단 받고 본다. "페이팔이 안 된다고요?"
무념무상으로 파마약을 도포하는 원장님에겐 주문서가 필요 없다. 뿌리를 매직 스트레이트로 다림질한 다음 최대치로 컬을 말아버리는 펌의 이율배반. 묶어도 풀어도 무방한 극단의 실용주의자용 헤어스타일. 워낙 싼데다 영양까지 서비스로 왕창 도포해주시는 단골 미용실이지만 치명적인 단점이 하나 있었으니. 일인 미용실의 특성상 곱절의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 구름처럼 푹신한 미용실 의자가 고문 의자로 변신할 때쯤 탈출할 수 있다.
그럼에도 탕아처럼 되돌아오는 이유는 원장님이 묵언수행을 아시는 분이기 때문. 물론 나에게만 한정된 특혜일지는 모르겠으나. 앉자마자 노트북에 고개를 처박는 지인의 며느리에게 불필요한 대화를 걸지 않는 센스. 소모적인 스몰 토크 청정지대. 내가 원장님을 암묵적으로 친애하는 이유. 완전히 탈색하지 않으면 진한 갈색도 안 먹는 흑발이라 염색은 일찍이 포기. 자주 관리해야 하는 커트 머리도 탈락.
미용실에 가기 싫어 헤어 에센스를 꼬박꼬박 바르며 성능 좋은 드라이어를 들이지만, 정작 2주마다 꼬박꼬박 아이 미용실에 들르는 인생의 아이러니란. 구레나룻 지점에 콕 박힌 이루공에 머리가 닿을랑 말랑 하기까지 보름. 더우나 추우나 박새로이 컷을 고수하며 최대한 짧게라는 주문을 잊지 않는다. 어류의 흔적이라는 이루공을 사수하려니 앞머리 기장은 계속 올라간다.
인면어를 빼닮은 아이의 톡 튀어나온 이마가 귀여워 사진을 남기는 구도, 클수록 머릿결이 억세진다는 둥 미용실 원장님과의 대화. 질리지 않는 장면들이 똑같이 반복되는 동안 내 눈은 네 얼굴에 붙박이. 내 최애를 스크린이 아닌 직접 키우는 기쁨에 애가 끓는다. 바짝 자른 머리에 물을 묻혀 빗겨주는 아침이면 똑같은 멘트 재생. “차 조심하고 길 건널 때 꼭 손 들고!” 듣는 둥 마는 둥 돌아서는 아이의 뒤꽁지로 다급한 메아리가 퍼진다. "엄마 사랑해~ 하고 가야지!"
그제야 부스스한 내 머리칼을 끌어 모아 굴러다니는
연필이든 집게든 한 번에 묶으며 하루를 연다. 전장에 나가는 장군이 상투를 틀어 올리는 심정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나름의 모닝 리추얼. 지금 상영 중인 내 인생의 회차 제목은 <엄마는 덕질 중>. 김뚜껑 같은 머리를 하고 총총 뛰어가는 120cm짜리 꼬마는 이 사실을 알까. 존재만으로도 너는 내 햇살. 나의 외로운 마음을 우산같은 머리로 덮어주고 있구나.
youme
너와 나, 합해서 우리.
[프랑스의 소피] 너는, 나와 같지 않기를
드륵드륵, 분홍색 자전거 페달 위로 너의 반짝이는 두 다리가 힘차게 내려앉았다가, 살며시 물러나기를 반복한다. 작은 몸에 꼭 맞는 자전거, 그 위의 동그란 핸들엔 별처럼 반짝이는 너의 손이 야무지게 얹혀 있다. 바람은 머리칼을 흔들고, 그 사이로 나비처럼 가벼운 …
지나간 자리에 남겨진 것
2024년 겨울 세일이 한창이던 어느 화요일, 우리 집 님과 나는 쇼핑을 했다. 나는 쇼핑에 별로 취미가 없지만, 님은 쇼핑을 좋아한다. 열심히 벌었으니 재밌게 쓸 일도 있으면 했기에, 세일 마지막 날, 휴가 내고 같이 쇼핑을 가자고 제안했다. 님이 들뜬 얼굴로 운동복 몇 개를…
순수의 공소시효
"엄마! 이슬이 꽃을 씻겨주나 봐." 말간 얼굴을 바짝 들이민 아이가 종알종알 얘기한다. 호기심은 오직 맑은 영에 깃든다. 우리에게 시간을 거스를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처럼 순수함에도 공소시효가 있을까. 나는 오직 아이만이 발견할 수 있는 세상의 아름다움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기억의 …
행운도 불운도 아닌 전환점
나는 어렸을 때부터 불안이 높고 자기 영역이 확실했다. 기질 검사를 하면 위험회피는 97%고, 정서적 개방성이 극단으로 낮으며 거리 두기는 높게 나왔다. 한참 유행이었던 MBTI 검사에서는 내향형이 85%였다. 기질이나 성격 검사를 하면 중간인 항목이 별로 없어서인지 검사를 하지 않아도…
[프랑스의 소피] 중세로의 시간 여행 – 프로방의 메디발 축제
프랑스의 6월. 봄의 선선한 바람이 아직 머무는 가운데, 여름의 따가운 태양이 성급히 얼굴을 내민다. 이 절묘한 계절의 경계선 위에서 프랑스는 과거와 현재가 겹쳐지는 마법 같은 시간을 맞이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특별한 순간은, 파리 동쪽의 작은 중세 도시 프로방(Provins) 에서 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