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가 그리스로 떠난 이유

2025. 06. 11by오자히르

 



 서울에서 아테네로 이사했다. 남편이 그리스로 발령을 받았다. 그것도 4년이라니. 이건 나의 계획이 아닌데. 아직 나는 한국에서 하고픈 일이 많은데. 앞으로 가족과 친구를 쉽게 볼 수 없다는 생각에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일상의 소소한 행복에 만족하는 사람인데, 굳이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먼 나라로 떠나고 싶지 않았다. 익숙한 집, 발리 부럽지 않은 동네 요가원, 매일 가는 도서관, 친절한 단골 카페, 편리한 새벽 배송까지 모두 그리워질 테니까.

 

그러나 언제부턴가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한껏 받아들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삶은 계획대로 되지 않으니까. 최근 몇 년간 소중한 사람들을 하늘로 떠나보내며, 삶을 가볍고 즐겁게 살고 싶어졌다. 당분간은 커리어보다 엄마의 역할이 더 커진다 해도, 내 삶에 이런 일이 일어난 건 모두 이유가 있지 않을까. 20대와 30대엔 무언가 성취하기 위해 애썼으니, 다가올 40대는 원하는 삶을 살아보라고 신이 준비해 둔 건 아닐까.

 

지구에서 주어진 시간은 유한하고 

삶은 즐기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저 내맡겨보는 건 어떨까

2024년 10월, 남편은 먼저 출국해 떠났다. 그렇게 나는 3개월간 혼자 아이를 돌보며, 해외 이사를 준비했다. 짐을 하나씩 정리하고, 사람들을 만나며, 앞으로 필요할 물건을 샀다. 현지에서 아이가 다닐 학교를 알아보고, 온라인으로 입학시험과 인터뷰를 보았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그리스 아테네.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생각할 여유도 없이, 매일 쏟아지는 해야 할 일 목록을 지워가며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그리고 2025년 1월 1일, 새해 첫 날을 아테네에서 맞이했다. 

 


 1월의 아테네는 가을처럼 따뜻했다. 과거로 시간여행을 한 듯 베이지 톤의 오래된 도시 같았다. 도심 한가운데 약 2천 년 전 지어진 파르테논 신전이 있어 신비로운 분위기가 맴돌았다. 처음 맞이하는 일요일, 상점이 대부분 문 닫아 할 일이 없어 아레이오스 파고스 언덕에 올라 아테네 시내를 내려다 보았다. 탁 트인 하늘과 선선한 공기에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아직 정리되지 못한 마음과 후회, 설렘, 아쉬움, 그리움, 슬픔이 뒤섞인 오묘한 감정이 올라왔다. 그리고 신이 따뜻하게 위로해 주는 것 같았다. 모두 괜찮다고. 그저 주어진 삶을 살아가면 된다고. 

 

어느덧 5개월이 지났다. 이제서야 적응이 된 듯하다. 그리스는 한국과 정반대인 나라처럼 느껴진다. 겨울에 습하고 여름에 건조하다. 한국은 빠른데, 그리스는 느리다. 한국에서는 타인의 눈치를 살피는데, 그리스에서는 남에게 전혀 관심이 없다. 연중 온화한 기후 덕분인지, 사람들은 느긋하고 여유롭다. 친절하다. 소박하고 꾸밈 없다. 테라스가 방마다 있을 만큼 자연을 사랑하고 즐긴다. 눈부신 하늘, 따스한 햇살, 아름다운 바다… 천혜의 자연환경을 가진 축복 받은 나라다. 겨울에도 따뜻한 나라, 습하지 않은 여름이라니. 

 

 

 무라카미 하루키가 먼 북소리를 듣고 그리스로 떠난 이유를 알 것 같다. 아름답고 위대한 자연 앞에 인간은 한없이 작은 존재라는 걸 더 생생히 깨닫는다. 천천히 흐르는 시간. 물질보다는 정신이, 소유보다는 존재가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곳. 앞으로 어떤 삶이 펼쳐질지 모르지만, 해외에서 육아와 집안일은 오롯이 나의 몫이 되겠지만, 주어진 삶을 감사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삶이 원하는 대로 흐르지 않아도 괜찮은 이유는 신이 더 좋은 계획을 보여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루키와 다른 점이 있다면, 나에겐 키워야 할 아이가 있다. 사교육 없이 자란 아이. 하교 후 텅 빈 운동장에서 같이 축구하고, 도서관에서 책 읽고 한가로이 산책하던 우리. ‘내가 잘 하고 있는 걸까’라는 의심이 들게 하는 사교육 환경을 잠시 벗어난 것만으로도 해방감이 들었다. 엄마인 나도 남의 기대에 부응하는 삶을 멈추고, 있는 그대로의 나로 살아보고 싶었다. 5개월이 지난 지금, 삶의 속도를 늦추니 보인다. 삶이 단순해졌다. 정신적 탈바꿈이 이루어질 것만 같다. 용기 내어 떠나길 잘했다. 먼 북소리를 듣고 떠난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오 자히르 

sarahbaek5@gmail.com

@sarahbaek

 

오자히르

번역가

단순한 삶 속에서 지혜와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