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기분: 즐거움

2025. 05. 11by한도리

 

(출처: IMDb)

 

<이터널 선샤인>은 앞으로도 잊을 수 없는 영화로 남을 거다. 내게 육아로 서서히 잃어가는 기억의 존재를 확인시켜 준 영화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당신도 지우고 싶은 기억이 있는지, 만약 그렇다면 어떤 변화가 생길지, 운명 혹은 고집스러운 취향을 믿는지 묻는 대표적인 영화인데, '오! 역시 명작이야!' 하며 높은 별점을 주려던 순간 이미 과거의 내가, 그것도 낮은 별점을 매겨두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소 당황스럽기는 하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내 주위 모든 사람들에게 한 번씩 이야기하며 웃을만한 재미있는 소재가 하나 생겼다.

 

나는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기를 즐겨한다. 두 가지 의미에서 그러한데, 나로 인해 누군가 행복을 느끼고 미소를 짓는 장면은 몇 년이 지나도 다시 떠오르는 가슴 벅찬 일이다. 한편 내가 때때로 기지를 발휘하여 상대방을 말 그대로 '웃기는' 경우에는 오래가지는 않지만 '즐거움 계기판'의 화살표를 초록에서 빨강으로 순식간에 올리는 쾌감이 발생한다. 여기에는 좀처럼 끊을 수 없는 중독성이 있어 나는 누구와 어떠한 대화를 나누다가도 틈이 날 때마다 농담을 던지는데, 다행히 대체로 통하여 분위기가 부드러워지거나 호감을 사는 장점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평소에 유머 선집을 찾아 읽어둔다든가, 처음 만난 사람과 대화를 시작하기 좋은 농담 5가지를 외워 연습한다든가 하는 건 아니다. 대신 온갖 주제를 재미있어하는 내 성격을 활용하여 상대방의 관심사와 눈빛, 말투에서 실마리를 찾고 그에 적합한 말을 건네려고 노력한다. 클레멘타인이 조엘에게 즐겨 찾는 책방에서 서로를 마주쳤던 거라며 반가워하고, 자신의 머리카락 색깔과 이름을 소재로 농담을 하며 친밀감을 쌓으려 하는 장면과도 비슷하다.



(출처: IMDb)

 

요즘은 보통의 농담으로는 만족시키기 어려운 상대를 웃게 하는 비법을 하나둘 익히는 중이다. 며칠 뒤면 만 16개월이 되는 아기를 말로 웃게 하려면 뛰어난 관찰력과 어느 캐릭터든 찰떡 같이 소화하는 연기력, 같은 소리를 하루에 100번쯤 내어도 지치지 않는 지구력이 필요하다. 최근에는 인간을 제외한 다양한 생물을 세밀화로 표현하고 다시 단순한 그림책의 형태로 엮어낸 보드북을 종종 보는데 "오징어 한 마리 주면 안 잡아먹지. 아이쿠, 먹물이다!"라는 대사를 들을 때마다 신나게 웃어대서, 영문은 모르겠지만 하루에 몇십 번은 같은 대사를 반복하고 있다.

 

아기가 누워서 천장만 보던 신생아 시기에는 도무지 놀아줄 방법이 없어서 동요를 불러주곤 했는데, 동요를 제대로 불러 본 지 30년은 훌쩍 지났기에 기억하는 가사가 없어서 인터넷을 찾아보곤 했다. 그나마도 혼자 노래를 부르려니 쑥스러운 마음이 커서 애써 용기를 모으고 또 모아 몇 곡 레퍼토리를 만들었다. 엄마가 된 지 16개월이 경과한 지금은 나도 모르게 동요를 흥얼거리면 아기가 사운드북을 찾아서 해당 노래의 버튼을 눌러 음악을 들려준다. 책을 읽어줄 때면 실감 나는 연기에 나도 놀라 가끔은 구연동화를 녹음해 볼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 모든 변화가 아기의 웃음 덕분이다. 노래를 듣다가 엄마가 장난을 치며 따라 부르는 부분이 나오면 잔뜩 기대에 찬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다 활짝 웃거나 씨익 장난기 어린 표정을 짓는다. 읽어줬으면 하는 책을 들고 와서 두 손으로 내민다. 물론 예의를 차리느라 하는 행동은 아니고 아직 아기의 몸에 비해 책이 좀 크다. 재밌는 장면이 나오기 전에 웃을 준비를 하는 게 너무나 귀엽다. 그게 나도 신이 나서 같은 대사를 여러 번 반복해 들려주면서도 좀처럼 지치지 않고, 아기가 요즘은 어디에 관심이 있는지 주의 깊게 살피게 된다.

 

아기와 내가 공유하는 시간이 긴 만큼, 우리는 서로가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알아가고 충족하며 애정을 키운다. 그 감정은 일방적이지 않다. 내가 "엄마 뽀뽀"라고 말하면 아기는 때때로 볼에 입을 가져다 댄다. 양손을 활짝 펼친 채, 귀 높이 정도로 올리고 스스로 일어서는 연습을 할 때면 엄마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듯한 표정으로 꼭 눈을 마주치고 나서야 행동을 하기 시작한다. 최근 아침에는 반려인이 먼저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고 아기가 깨어나면 함께 시간을 보낸다. 나는 반려인이 집을 나서기 20분 전쯤 일어나 부스스한 모습으로 나오는데, 아기는 어디선가 공을 들고 와 건네는 걸로 인사를 대신한다.

 


(얼굴만 숨기고 까꿍놀이 중인 우리집 아기)

 

재밌다. 물론 종종 지루하고 몸도 마음도 지친다. 그래도 점점 재미가 있다. 아기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게 즐겁다. 아기가 변화하는 모습을 보며 지금의 내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생각하는데, 이게 꽤 흥미롭다. 아기가 말을 하기 시작하고, 자신의 의지로 무언가 선택하는 일이 잦아진다면 그의 모습에서 내 장점과 단점을 더 쉽게 발견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내 자식이니 나를 닮아서라기보다는 한 인간이 성장하는 과정이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일 거다.

 

요즘 즐겨하는 게임 애플리케이션은 매일 저녁 8시 45분쯤 되면, 오늘 하루가 어땠는지 묻는 알림을 보낸다. 최대 4장까지 사진을 올리고 오늘의 기분을 슬픔, 보통, 즐거움을 나타내는 표정으로 기록할 수 있다. 나는 주로 '보통'을 선택하는 성격인데, 최근에는 별 일이 없다면 '즐거움'을 고른다. 내 변화가 나도 놀랍다. 아기와 함께 웃는 시간이 단 몇 분이어도 나는 오늘 하루를 즐거웠다고, 행복했다고 기억한다. 

 

'유아 기억상실증', 3세 이전에는 언어 능력이 완전히 발달하지 않아서 어떠한 상황이나 사건을 온전히 이해하고 장기 기억으로 가져가기 어렵다는 이론이다. 그러나 기억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우리의 뇌 속 어딘가에 불안정하게 자리하여 '암시적 기억'으로서 어딘가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고 한다. 매일 무엇을 하였는지 기억하지는 못해도 포옹의 따뜻함, 놀잇감에서 얻는 즐거움 혹은 큰 충격과 같은 감정의 찌꺼기는 남을 수 있다는 말이다. 아기가 자라며 지금의 기억은 분명 잊히겠지만, 부디 우리가 같이 나눈 즐거운 감정만은 어딘가에 남겨주길 바라본다.

한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