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심삼일

2025. 05. 12by한도리

 作心三日. 

 

한자로 써놓으니 제법 그럴듯합니다. 글자 하나하나 생김이 귀엽기도 하고요. 새해라면 한국인이라면 분명 누구나 한 번쯤 떠올리는 사자성어랄까요. 하지만 생애 처음으로 엄마의 삶을 맞닥뜨린 저에겐 작심삼일조차 없는 새해가 두 해째 이어지고 있습니다.

 

내가 가진 24시간, 1주일, 1달, 1년을 어떻게 쓸 것인지, 이제는 혼자만의 생각으로 정할 수 있는 건 아니더군요. 무엇보다 아기에게 순조로운 일상을 보장하는 일이 최우선입니다. 과업을 함께 해나가는 반려인과도 호흡을 맞춰야 하고 말이죠.

 

물론 15개월을 하릴없이 흘려보내기만 하지는 않았아요. 지난해 이맘때, 나는 습설과도 같은 시간을 보내며 앞으로 남은 생애를 상상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내가 아닌 누군가를 중심에 두는 일상에 꽤 익숙해지는 한편, 다시 본격적으로 바깥세상을 향해 출항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조개가 두꺼운 껍질 속에 몸을 숨기듯 행인이 눈만 쏙, 손만 쑥 꺼내놓는 강추위가 계속되는 한 주였습니다. 아기와 가벼운 산책을 하기에도 매서운 날씨라 내내 집에서만 지냈습니다. 친구 여럿과 이야기를 나누는 메신저에는 비명과 한탄이 종종 교차했지요.

 

육아를 하는 동안 뜨거운 여름이든 차디찬 겨울이든 계절의 냄새가 얼마나 그리운지 몰라요. 수행을 하듯 반복되는 일상으로 인하여 찬 바람에 섞여오는 과거의 기억이 오히려 더 또렷해진답니다. 그래서 주말에는 산책을 나섰습니다. 추워도 좋으니 좀 걷고 싶었어요.

 

집 근처 몇 블록을 돌아보고 올 돌아올 생각이었습니다만, 북풍의 거센 입김이 내 속에 꽁꽁 감춰둔 충동을 끄집어냈어요. 걷고 또 걸었습니다. 종종 사진을 찍으면 손가락이 얼어붙을 듯했고, 이러다 앓아눕는 일은 없어야 할 텐데 걱정도 했답니다. 입술을 오므려 입 속에 아직 남은 따뜻한 기운을 빌려 썼어요. 그래도 멈출 수가 없었어요.

 

 


 

 

노르웨이의 어느 작가의 소설을 성우의 음성으로 들으며 걸었습니다. 피오르 해안을 오가는 선장이 주인공인데 섬에 살며, 섬을 걷는 내게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어요. 차디찬 바닷물과 다른 나라에 소식이 전해질 정도로 큰 눈이 내렸다는 구절에서는 어쩌면 이렇게 꼭 맞는 작품을 만나게 되었을까 기뻤답니다.

 

만들어낸 인생을 몇 개나 지나 보내고 어느덧 얕은 언덕에 이르렀습니다. 바다를 내려다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후련했어요. 만 보 가까이 걷는 동안 나를 제외하고는 행인이 단 한 명도 없었는데, 포구에는 차를 타고 온 관광객이 여럿 있었답니다.

 

그만 집으로 들아가는 버스를 찾아볼까 하다가 횟집과 카페를 지나 더 들어가기로 했어요. 종종 친구들이 섬에 놀러 올 때면 방파제 위에서 낚시하는 인파를 지나 포구 끝자락에서 바다를 아주 가까이 마주하곤 했거든요. 그 기억이 떠올라 발길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그간의 고생과 망설임을 후련하게 날려버렸지요.

 

 



 

섬에 살면서도 눈 부시게 파란 바다를 보는 건 일 년에 고작 한 두 번입니다. 갯벌이 더 익숙한 서해이기 때문이죠. 때때로 "바다는 역시 동해야!" 외치기도 하지만, 갯벌의 다양한 생태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보물입니다. 우리 섬에는 특히 흰발농게와 저어새가 특별한 걸음을 이어가고 있어요.

 

갯벌의 생명들은 겨울엔 잠을 잔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얼음이 바다를 뒤덮은 날이 계속된다면 녀석들이 버티기 어려울지도 모르겠어요. 급격한 기후 변화로 어려움을 겪는 모든 존재에게 응원과 위로를 보내 봅니다.

 

 


 

 

지금 겪는 시간이 마치 저 바다와도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장 눈앞에는 두터운 얼음뿐이라 배가 들어올 수도 나갈 수도 없지만, 반대편 바다는 아직 얼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갯벌 위를 기어 다니던 수많은 생명은 더 이상 보이지 않지만 실은 깊고 깊은 굴을 파고 그 안에서 봄을 기다리고 있어요.

 

삼일조차 작심하지 못한들 어때요. 그저 매일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하고 또 하루 잘 보냈구나 감사한 마음을 가지면 그걸로 되었지요. 얼음 조각이 하나둘 녹아내리고 다시 봄이 오면 새로운 생명이 또 깨어나고,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는 생태계를 이어나갈 겁니다.

 

 

새해를 맞이하는 마음, 이 정도면 어때요?

한도리